"조사 기간에 3차 피해"···뉴질랜드 대사관 성희롱 사건 전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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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소재 국가인권위원회 전경. [JTBC 캡처]

서울 중구 소재 국가인권위원회 전경. [JTBC 캡처]

2017년 뉴질랜드 한국대사관에서 고위 외교관 A씨가 현지 직원의 신체를 부적절하게 접촉했다는 사건과 관련해, 당시 피해자가 1ㆍ2차 피해 사실을 대사관 측에 알린 뒤 조사가 이뤄지던 시기에 다시 3차 피해가 일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인권위 결정문으로 본 '사건의 재구성'

중앙일보가 11일 입수한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위원회의 결정문에 따르면 뉴질랜드 대사관은 사건 당시 매뉴얼이 없는 상태에서 내부 직원들 간의 회의를 통해 초동 대응을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대응이 이어지며 피해자 B씨는 2년 가까이 피해를 호소했고, 결국 양국 간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하게 됐다는 것이다.

인권위는 A씨에 성희롱에 대한 책임으로 1200만원을 지급하라고 권고했고, 외교부에는 재외공관의 성희롱 사건 매뉴얼을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피해자는 사건 당시 뉴질랜드 대사 등 A씨 외에 관련자들의 처벌까지 요구하는 입장이다.

성희롱 사건 조사 중인데 피해자에 업무 지시

서울 도렴동 외교부 전경. [뉴스1]

서울 도렴동 외교부 전경. [뉴스1]

인권위 결정문에에 따르면 2017년 11월쯤 A씨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컴퓨터 작업을 도와주는 상황에서 B씨의 엉덩이를 접촉했고, 대사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허리 벨트와 배, 주요 부위를 접촉했다. B씨는 그해 12월 초 대사관 직원관리 담당 C씨에게 이 같은 내용을 알렸고, A씨가 B씨에게 비공식적으로 사과하게 된다.

그런데 약 3주 뒤인 12월 21일 B씨는 다시 A씨가 대화 도중 자신의 가슴을 더듬었다고 문제제기를 했다.

처음 사건이 불거지고 대사관에 신체 접촉 사실을 알린 뒤 A씨와 공간이 분리되지 않은 채 근무를 계속 했고, 이에 3차 사건이 또다시 일어났다는 얘기가 된다.

인권위 조사에 따르면 A씨는 대사관에서 이 사건을 조사하는 기간에도 B씨에게 전화로 업무를 지시를 하기도 했다.

더구나 대사관에서 A씨 사건 조사를 담당한 건 대사 외에 공관 직원 2명 등 내부자들이었다. 참사관급 고위직 A씨의 부하 직원들이 A씨 징계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뉴질랜드 대사관은 내부 회의를 통해 2018년 1월 A씨에 대해 ‘대사 경고’ 처분을 했고, A씨는 2018년 2월 아시아 지역 공관으로 발령이 나 현지를 떠나게 된다.

이후 B씨는 같은해 10월 외교부 본부 차원의 현지 감사에서 똑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이듬해 7월에는 뉴질랜드 경찰에 신고하고 언론에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국가인권위에도 진정을 넣었다.

인권위 "남성이라도 민감한 부위 접촉은 성희롱"  

 뉴질랜드 한국대사관에서 2017년 일어난 사건과 관련한 뉴질랜드 현지 언론 보도. [뉴스허브 캡처]

뉴질랜드 한국대사관에서 2017년 일어난 사건과 관련한 뉴질랜드 현지 언론 보도. [뉴스허브 캡처]

인권위 결정문으로 보면 외교부와 뉴질랜드 대사관 측이 첫 단추부터 잘못끼워 사건을 키웠다는 지적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인권위는 A씨가 B씨의 엉덩이와 가슴, 배 부위를 접촉한 사실에 대해서는 “B씨 진술이 일관되고 A씨도 신체 접촉은 인정한 점으로 보아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성희롱의 당사자는 반드시 이성 간이어야 인정되는 것이 아니고, 동성 간에도 성적 함의가 담긴 언동으로 B씨가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꼈다면 성희롱이 성립된다”며 “A씨가 접촉한 엉덩이, 가슴, 배는 남성에게도 성적으로 민감한 부위로 직장 내에서 격려의 마음이나 친밀감을 표현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인권위는 B씨가 이후 외교부 본부 차원의 A씨 징계(감봉 1개월) 결과가 나오고 뉴질랜드 경찰에 신고(2019년 7월 경)한 뒤 대사관에 새롭게 진술한 ‘주요 부위 접촉’에 대해서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인정하지는 않았다.

인권위는 또 외교부가 진정인의 신고 접수 이후 한 조치에 대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 절차상 문제가 있었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B씨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료비 5000만원 넘어”

 뉴질랜드 피해자 측이 지난달 청와대에 보낸 이메일. [중앙포토]

뉴질랜드 피해자 측이 지난달 청와대에 보낸 이메일. [중앙포토]

B씨는 현재까지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권위에 “사건 당시 가해자와의 분리 조치와 휴가처리, 의료 비용 등 제대로 된 지원을 대사관 측으로부터 받지 못 했고, 이 때부터 정신적 외상에 시달리고 있다”고 진술했다.

올해 4월 기준 약 7만 뉴질랜드 달러(한화로 5500만원 가량)의 의료비 내역도 제출했다. B씨는 지난해 7월부터 장기 병가를 낸 상태라고 한다.

인권위 결정문에는 그간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던 외교관 A씨의 주장도 비교적 상세하게 담겼다.

A씨는 2017년 말 B씨의 신체를 접촉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성적 의도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B씨에게 사과한 부분에 대해서도 A씨는 “서로의 관계 회복을 위해 미안하다고 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어 A씨는 “가슴을 친 것을 주물렀다고 사실을 왜곡하는 B씨에게 공포감을 느끼게 됐으며, 사건 초반 B씨의 주장을 톤 다운 하는 선에서 행위를 인정하는 이메일을 쓴 것이 엄청난 족쇄가 됐다”고도 했다.

외교부 측은 “본부 차원에서 A씨를 징계한 것은 물론 B씨에게 고용노동부와 국가인권위원회 구제 제도 등을 안내했고, 병가와 휴가를 충분히 쓸 수 있도록 했다”는 입장이다.

사건 초반 뉴질랜드 한국 대사관의 내부 징계 결정 과정이 부실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내부 회의에는 A씨 부하직원들 뿐이 아니라 상급자인 대사도 참여한다”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반박했다.

정효식ㆍ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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