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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휴가’와 금수저 병역관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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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태정 기자 중앙일보
염태정 사회부디렉터

염태정 사회부디렉터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아들이 카투사(KATUSA)의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경북 포항의 미군 유류 보급부대에서 30년 전 카투사로 근무했다. 힘들 때도 있었지만, 생활은 대체로 편했다. 업무를 마치면 상당한 자유 시간이 보장됐다. 책 읽고 운동하고 때론 시내에 나가 술도 마셨다. 내년쯤 군대 가겠다는 둘째 아들에게 이왕이면 카투사로 가라고 권하고 있다. 요즘엔 군대에서 휴대전화를 쓰고, ‘아미고’ 같은 앱을 통해 생활하는 모습도 바로 알 수 있다.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카투사가 더 편하고 뭐라도 더 배우지 않을까 싶어서다.

커지는 추 장관 아들 휴가 의혹 #국방장관 서류 처리 미흡 인정 #불공정 병역은 사회 갈등 키워 #철저히 조사해 진실 규명해야

‘휴가 미복귀 의혹’을 받는 추 장관의 아들 서모(27)씨도 그런 마음으로 카투사에 갔을 거다. 서씨가 아무 문제 없이 군 생활을 마쳤으면 좋았을 텐데, 당시 휴가 복귀 문제로 지금 나라가 시끄럽다. 서씨는 2017년 6월 5~14일, 15~23일 두 차례 병가를 썼다. 추 장관이 더불어민주당 대표였을 때다. 서씨는 예정대로라면 6월 23일 복귀했어야 하나 개인 휴가 명목으로 같은 달 24~27일 부대 밖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상급부대 대위가 휴가 연장 건을 직접 처리하겠다고 했다는 서씨 동료 병사의 증언, 보좌관 전화 얘기 등이 나오면서 외압 의혹이 불거졌다. 국회에선 고성이 난무한다. ‘탈영’ ‘전대미문의 군기 문란 사건’에서 “소설 쓰시네”까지 오가는 말은 거칠다.

‘부모가 결정되는 순간에 당신의 인생 게임은 이미 절반쯤 끝나버린다.’ 미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파헤친 정치철학자 매튜 스튜어트가 『부당세습』에서 한 말이다. 어린 시절 해마다 백만장자였던 할아버지 집에 가서 멋진 휴가를 보냈던 ‘귀족’이었음을 고백하는 거로 시작하는 이 책에서 스튜어트는 미국 사회에서 자식 장래에 부모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분석한다. 복권 중에 으뜸이 정자 복권 (sperm lottery)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조국 전 법무장관 딸 입시 문제를 비롯, 최근 우리 사회에 갈등을 불러온 상당수가 부모의 ‘자식 편애’와 관련돼 있다.

서소문 포럼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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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미복귀 의혹은 부모의 영향력에 관한 얘기다. 거짓말 의혹으로도 커지고 있다. 동년배는 물론 부모도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미복귀 의혹 당시의 한 카투사 병사는 이런 말을 한다. “엄마가 당 대표면 휴가 미복귀해도 저렇게 되는구나.” 그 말엔 부러움과 짜증이 담겨있다. 힘없는 부모는 자괴감을 느낀다. 이런 댓글이 있다. ‘전방 철책 근무하는 우리 아들. 휴가 복귀 날 감기몸살로 38도 열나는데도 칼같이 복귀했다. 부대로 전화해도 소용없다. 보내고 나서 상봉터미널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아들아 흙수저라 미안타.’ 추 장관과 변호인은 “절차대로 했다. 황제 휴가로 호도해선 안된다”는 입장이다. 문제없다던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일부 행정처리가 정확하지 못했다”고 실토했다.

고위공직자 집안의 병역 문제는 청문회·국정감사의 단골 소재다. 본인 또는 아들의 군 복무 문제로 곤경에 처한 정치인도 상당하다. 이번이 다른 건 병역 의무 이행 자체가 아니라 휴가·외압 문제란 거다. 싫어도 군대 가야 하는 우리나라에서 병역은 그만큼 민감하다. 나라를 움직이는 사람이 본인이나 자녀의 병역 의무는 제대로 안 하면서 국민에게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말하긴 어렵다. 모범을 보여야 한다. 영국은 왕실 남자들이 모두 군대를 갔다. 심지어 엘리자베스 2세 여왕(94)도 2차 대전 때 수송장교를 했다.

지도층 및 그 자제의 병역이 민감한 만큼 이른바 금수저의 병역 관리를 강화하는 법도 마련됐다. 병무청은 ‘병적 별도관리 대상자’로 분류된 사람들에 대하여 매월 안내문을 발송하고 있으며 연간 발송 인원은 6000여명이다. 공정 병역을 위해 2017년 9월 개정된 병역법에 따른 것이다. 4급 이상 고위공직자와 자녀, 고소득자와 자녀, 연예인·운동선수 등이 대상이다. 대상자가 되면 징병신체검사, 보충역이나 면제 판정, 입영 연기 등에 관해 면밀한 검증을 받는다.

추 장관 아들의 휴가 미복귀 의혹을 계기로 지도층 및 그 자제의 병역 이행뿐 아니라 복무 상황도 제대로 살펴야 한다. 서씨가 ‘엄마 찬스’를 써서 부당하게 휴가를 연장받았는지도 신속하고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사실 아들이 한쪽 다리 수술을 했다. 더는 아들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모정으로 호소하는 추 장관을 위해서도 그리해야 한다. 이 정부는 공정의 이름으로 부당한 영향력을 최소화하겠다고 강조해 오지 않았는가.

염태정 사회부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