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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아베와 '흙수저' 스가를 이어준 건 ‘북한’...만년 비서, 아베가 남긴 숙제 이어받는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이 2일 오후 5시 자민당 차기 총재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공식 선언을 한다. 선거(14일)는 열흘 넘게 남았지만 이미 자민당 의원 표의 70%를 확보해 '사실상 차기 총리'라는 말을 듣는 상태다.

스가, 2일 자민당 총재선거 공식 출마 선언 #출마 전 이미 의원표 70% 확보, 당선 확실시 #아베-스가 인연, 2002년 북한의 일본인 납치 #아베정권 정책 그대로 계승할 가능성 높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5월 기자회견을 마친 후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두 사람은 2002년 북한 문제로 인연을 맺은 후 정치적 여정을 함께 해왔다. [AP=연합뉴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5월 기자회견을 마친 후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두 사람은 2002년 북한 문제로 인연을 맺은 후 정치적 여정을 함께 해왔다. [AP=연합뉴스]

2일 요미우리 신문, 아사히 신문 등 일본 언론들은 스가 장관이 이미 자민당 내 1, 2위 파벌인 호소다파, 아소파를 비롯한 당내 7개 파벌 중 5개 파벌의 지지를 확보했다고 전했다. 이로써 총재 선거에서 국회의원들이 행사하는 394표 가운데 70% 이상을 얻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자민당은 이번 총재선거를 당원 투표를 제외하고 국회의원 표 394표에 자민당 각 도도부현(都道府縣ㆍ광역자치단체) 지부 연합회 대표가 행사하는 141표를 더해 총 535표로 결정되는 '약식 선거'로 치르기로 했다. 스가 관방장관은 현재 국회의원 표만으로 전체 표의 53∼55%를 확보한 셈이 된다.

이번 선거는 스가 장관과 1일 출마 선언을 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정조회장,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자민당 간사장의 '3파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자민당 차기 총재 선거에 출마한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정조회장,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왼쪽부터). [AFP=연합뉴스]

자민당 차기 총재 선거에 출마한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정조회장,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왼쪽부터). [AFP=연합뉴스]

북한 문제로 맺어진 18년의 인연 

스가 장관이 순식간에 '대세'로 떠오른 건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선택이었다고 일본 언론들은 분석한다. 아베 총리가 자신의 남은 임기를 이어갈 인물로 7년 8개월간 옆에서 '비서실장' 역할을 해 온 스가를 점찍었다는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아베와 스가는 정반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상이한 배경을 갖고 있다. 아베 총리가 '외할아버지 총리, 아버지 외무상'이란 배경을 갖춘 정치명문가의 '도련님'이라면, 스가 장관은 배경 없이 자수성가한 '흙수저 출신' 정치인이다.

그런 두 사람을 가깝게 만든 계기는 북한 문제였다. 스가 장관은 지난 2013년 일본 격주간지 '프레지던트'(2013년 11월 18일호)와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와의 첫 인연에 대해 "2002년 북한 화물여객선 '만경봉호' 입항 금지 법률을 의원 입법으로 만들 때부터"라고 답했다.

지난해 8월 1일 '왕위계승식전 사무국' 현판식에 나란히 참석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오른쪽)와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왼쪽). [지지통신 제공]

지난해 8월 1일 '왕위계승식전 사무국' 현판식에 나란히 참석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오른쪽)와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왼쪽). [지지통신 제공]

당시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가 불거지면서 일본 사회에 반북 분위기가 거세게 일었다. 북한과 일본을 오가는 만경봉호의 일본 입항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당시 자민당 총무를 맡고 있던 스가 장관이 관련 법안을 주창했다. 그러자 당시 관방부장관이던 아베 총리가 연락을 해 "전적으로 협력하고 싶다"며 지원 의사를 밝혔다.

아베가 사실상 '상왕' 노릇할 가능성도

스가 장관은 이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의) 국가관이 매우 매력적이었다. 이런 사람을 언젠가 총리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후 스가 장관은 아베 총리의 '그림자'로 대부분의 정치행로를 같이 했다. 2007년 아베 총리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실의에 빠져있을 때 "건강을 회복해 다시 총리를 해야 한다"며 위로한 사람도 스가 장관이었다.

따라서 '스가 총리'가 이끄는 일본 정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을 비롯해 대외정책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아베 내각의 연장 선상에 설 것으로 보인다. 사임 발표 회견에서 "의원의 한 사람으로 국정에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말했던 아베 총리가 사실상 '상왕' 노릇을 할 가능성도 점쳐지는 이유다.

스가 장관은 대부분의 사안에서 아베 총리와 노선을 함께 하지만, 2013년 12월 26일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할 때 "경제 재생이 우선"이라며 반대하는 등 일부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정치학자인 나카지마 다케시(中島岳志) 도쿄공업대 교수는 저서인 『자민당』(한국어 제목 '일본의 내일')에서 스가 장관은 아베 총리처럼 "뼛속부터 우파는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레이와 아저씨'..소탈한 이미지가 강점

세습 정치인이 즐비한 일본 정계에서 스가 장관은 가문, 학벌, 파벌 세 가지가 없는 '3무(無)' 정치인으로 꼽힌다. 아키타현의 딸기 농가에서 자라 고등학교 졸업후 도쿄로 올라와 골판지 공장에서 일했다. 뒤늦게 호세이대 정치학과 야간과정에 들어가 경비원, 주방보조, 어시장 짐꾼 등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고 한다.

2019년 4월 나루히토 일왕 즉위로 새 연호 레이와(令和)가 정해졌을 때, 액자를 들어 올리며 연호를 발표해, '레이와 오지상(레이와 아저씨)'이란 친근한 별명을 갖게 됐다. 차기 총리 선호도 조사에서도 입후보 가능성이 제기된 직후 지지율이 14%까지 순식간에 뛰어올랐다.

정치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지난 5월부터 격주간지 '프레지던트'에 독자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코너도 집필하고 있다. 제목은 '스가 요시히데의 전략적 인생상담'인데, 조직인으로서의 자세 등에 대한 솔직한 조언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일본 언론들은 "스가 장관이 술은 못하지만, 팬케이크를 좋아한다"는 등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조명하는 방송을 연이어 내보내고 있다. 그동안 한계로 여겨졌던 '없음'과 '드러나지 않음'이 장점으로 변모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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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윤설영 특파원, 서울=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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