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자의 V토크] 실패와 비난을 받아들이고 성장한 정호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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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C인삼공사 정호영. [사진 한국배구연맹]

KGC인삼공사 정호영. [사진 한국배구연맹]

'제2의 김연경'. 듣기만 해도 부담이 큰 수식어다. KGC인삼공사 정호영(19)이 그 주인공이다. 선명여고 시절 정호영은 큰 키(1m90㎝)와 운동선수 출신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체적 능력 덕분에 큰 기대를 모았다. 장신이면서도 빠른 몸놀림을 가져 김연경과 같은 대형 날개 공격수가 되길 바라는 배구계와 팬들의 희망이 겹쳐졌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반인 2018년, 드래프트를 앞둔 정호영을 바라보는 프로팀 감독들의 시선은 달랐다. 당시 팀을 이끌었던 6명의 사령탑에게 '만약 정호영을 데려올 수 있다면 어떻게 쓰고 싶으냐'고 물었다.

팀 선수구성의 차이도 있었겠지만 무려 4명의 감독이 "날개공격수가 아닌 미들블로커로 쓰겠다"고 답했다. A 감독은 "파워가 약하고, 리시브가 좋은 편은 아니다. 고등학교 때는 리시브를 거의 하지 않고 라이트로 뛰었기 때문이다. 스피드와 높이를 살린 센터가 적합할 것 같다. 솔직히 김연경이 되길 바라는 건 너무 큰 기대"라고 잘라말했다.

나머지 2명의 감독은 "훈련을 시켜보고 센터와 날개 공격수 중 고르겠다"고 했다. 서남원 KGC인삼공사 당시 감독이 그 중 한 명이었다. 정호영은 2019~20시즌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인삼공사에 뽑혔고, 첫 해엔 레프트 공격수로 뛰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리시브 부담을 견뎌내지 못했다. 20경기에서 올린 득점은 겨우 20점.

서남원 감독이 중도사퇴한 뒤, 대행직을 맡은 이영택 수석코치에게 다시 물었다. "정호영을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이영택 대행의 대답은 솔직했다.

"솔직히 호영이를 센터로 쓰는 게 부담스럽다. '제2의 김연경'이란 수식어도 있고, 팬들이 날개공격수로 뛰기를 바라는 기대도 있다. 하지만 선수 본인이 수비나 리시브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있다. 그 틀에 억지로 갇히는 것도 선수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일단은 경험을 쌓는다면 높이와 공격력이 나쁘지 않아 좋아질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내가 코치였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선 깊이 얘기해보지 못했다. 앞으로 2~3년은 호영이를 위하고, 팀을 위한 게 무엇인지를 봐야 한다."

KGC인삼공사 이영택 감독. [사진 한국배구연맹]

KGC인삼공사 이영택 감독. [사진 한국배구연맹]

시즌 막바지 이영택 대행은 정식 감독이 됐다. 그리고 코로나19로 19~20시즌이 조기종료된 이후 이 감독은 정호영과 면담을 했다. 정호영은 가벼운 마음으로 포지션 변화를 받아들였다. 이영택 감독은 "원래 밝은 친구인데 배구가 잘 안 되니까 힘들어했다. 그래서인지 센터 변신을 제안하자 호영이도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부분을 살리고 싶다'고 했다"고 말했다.

아직 단 한 경기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아 보인다. 정호영은 지난달 30일 열린 컵대회 조별리그 첫 경기 GS칼텍스전에서 3세트부터 교체 투입됐다. 0-2로 뒤지고 있던 KGC는 정호영이 투입된 뒤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정호영은 3세트에서만 8득점을 올렸고, KGC는 내리 세 세트를 따내고 역전승했다.

이영택 감독은 "솔직히 욕 먹을 각오도 했다"고 말했다. '대표팀 재목감인데 팀을 위해 포지션을 바꿨다'는 시선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은 결과로 돌아왔다. 이 감독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아는 것도 용기다. '제2의 김연경'이 되면 좋겠지만, '제2의 양효진'도 좋지 않느냐. V리그 최고연봉 선수가 양효진"이라고 했다.

실제로 GS칼텍스전 정호영의 플레이는 양효진 같았다. 중앙에서 속공을 하는 대신, 세터 염혜선이 높게 올려준 공을 날개공격수처럼 때렸다. 높이를 살려 블로킹 위에서 때린 공격은 위력적이었다. 양효진을 V리그 최고 센터로 만든 바로 그 패턴이다.

GS칼텍스전에서 높이를 살려 공격하는 정호영(왼쪽). [연합뉴스]

GS칼텍스전에서 높이를 살려 공격하는 정호영(왼쪽). [연합뉴스]

정호영 스스로도 만족했다. 데뷔 초 악플에 시달렸던 정호영은 "중학교 때부터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힘들었지만 지금은 많이 편해졌다. '못하면 욕먹는 게 맞지’라고 넘길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는 "아직 가운데에서 상대 공격수를 따라다니는 게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훈련하면 할수록 재밌는 것 같다. 측면 공격수로 뛸 때는 여기저기가 많이 아팠는데 센터 훈련하면서는 아픈 적이 없다"고 했다.

주변엔 좋은 멘토들이 있다. 염혜선은 현대건설 시절 양효진과 호흡을 맞췄다. 그는 날개 공격수 출신이라 타점을 잡아 때리는 게 능숙한 정호영의 장점을 살려줬다. 이영택 감독도 미들블로커 출신이고, 레프트에서 센터로 전향한 선배 한송이도 있다. 정호영은 "감독님이 경험을 자주 말씀해주신다. 한송이 선배는 제2동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알려준다"고 했다.

양효진은 올해 만 31세다. 내년 도쿄올림픽 출전은 문제가 없지만, 이후엔 세대교체가 절실하다. 현재 대표팀 미들블로커인 박은진(21·KGC인삼공사), 이주아(20·흥국생명)와 정호영은 스타일이 확연히 다르다. '센터' 정호영의 성장은 대표팀에도 호재다. 이영택 감독과 정호영이 실패와 비난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낸 덕분이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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