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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서 외면받으면 미래 없다" 넉달뒤 광주서 무릎꿇은 김종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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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호남에서 외면받으면 국민에게 다가설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정당엔 미래가 없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4월 비대위 출범 당시 비대위원들에게 했던 말이다. 그는 통합당이 어필해야 할 세 대상을 ▶호남 ▶수도권 ▶청년층으로 꼽았다고 한다. 복수의 비대위원은 “김 위원장은 그중 늘 첫 번째로 호남을 꼽았다”고 했다.

광주 5ㆍ18 민주묘지서 무릎 꿇은 김종인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19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무릎 꿇고 참배하고 있다. [뉴스1]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19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무릎 꿇고 참배하고 있다. [뉴스1]

김 위원장이 19일 광주 국립 5ㆍ18 민주묘지를 찾아 무릎을 꿇었다. 5ㆍ18 희생 영령을 기리는 추모탑에 헌화한 직후의 일이다. 무릎을 꿇은 채 15초가량 묵념한 그는 일어서며 잠시 비틀거렸다.

김 위원장은 민주묘지의 ‘행방불명자’ 묘역도 참배했다. 행방불명자 묘역은 5ㆍ18 민주화 운동 중 행방이 확실치 않은 희생자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별도로 마련된 공간이다. 당 관계자는 “이름 없는 희생자까지 잊지 않겠다”는 김 위원장의 뜻이 담겼다고 했다. 방명록엔 “5ㆍ18 민주화 정신을 받들어 민주주의 발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썼다.

앞서 참배 전 취재진 앞에 선 김 위원장은 광주를 향한 사과를, 자기반성으로 시작했다. 그는 “1980년 5월 17일 대학 연구실에 있었다. 시위 중단할 거란 방송을 듣고 강연에 열중했다”며 “광주에서 발포가 있었고 희생자가 발생했단 소식은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됐다. 알고도 침묵하거나 눈 감은 행위, 적극 항변하지 않는 소극성 역시 작지 않은 잘못”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역사의 법정에선 이것도 유죄다. 나는 신군부 집권을 위해 만든 국보위 재무분과위원으로 참여했다. 여러 번 용서를 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상심에 빠진 광주시민과 군사정권에 반대한 국민에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며 “다시 한번 이에 사죄한다”고 말했다.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 [중앙포토]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 [중앙포토]

발언 도중 잠시 눈시울이 붉어진 김 위원장은 이어 “부디 이렇게 용서를 구한다.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죄송하고 또 죄송하다”며 “너무 늦게 찾아왔다. 작은 걸음이라도 나아가는 것이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빌리 브란트의 충고를 기억한다. 제 미약한 발걸음이 역사의 매듭을 풀고 과거가 아닌 미래로 나아가는 작은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빌리 브란트는 서독의 총리를 지낸 반나치 운동가다. 1970년 나치 정권에게 막대한 피해를 당한 폴란드를 찾아 무릎을 꿇었고, 이듬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김종인 “호남 없인 미래 없다”

김 위원장은 최근 들어 호남 공략에 공을 들이고 있다. 최근 집중호우로 섬진강 유역에서 대규모 홍수 피해가 발생하자 전남 구례군에 당 차원의 봉사활동을 지시했다. 이날 광주 방문 일정도 이즈음 결정됐다고 한다.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11일 전남 구례군 구례읍 구성마을을 방문해 침수 피해 복구작업을 하고 있다. [뉴스1]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11일 전남 구례군 구례읍 구성마을을 방문해 침수 피해 복구작업을 하고 있다. [뉴스1]

18일엔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11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김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대한민국이 정말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나라라는 걸 보여준, 가장 획기적인 기여를 하신 분”이라며 “지금 통합과 화합이 절실하게 요구되는데 현재 야당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화합이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비대위원장 부임 이후 줄곧 “호남에서 한 자릿수 지지율로는 안 된다. 수도권에서도 30%가 넘는 호남 출향민들의 표를 얻어야 한다”고 호남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통합당은 지난 총선에서 28석이 걸린 호남에 절반에도 못 미치는 후보 12명을 공천했다. 득표율은 4%, 당선인은 한명도 없었다.

김 위원장은 호남과의 개인적 인연도 있다. 조부인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초대 대법원장)의 고향이 전북 순창이다. 김 위원장 자신도 6ㆍ25전쟁 때 광주에서 초ㆍ중학교를 다녔다.

이날 김 위원장의 사과에 당내에선 호평이 나왔다. ‘김종인 비대위’ 출범에 반대 의사를 밝혀왔던 장제원 통합당 의원은 이날 자신의 SNS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역사바로세우기’를 통해 계승하고자 했던 5ㆍ18 정신이 그동안 당의 몇몇 인사들에 의해 훼손됐던 게 사실”이라며 “당을 대표하는 분이 현지로 내려가 공식으로 사과하고 5ㆍ18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다짐한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이라고 썼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에선 엇갈린 반응이 나왔다. 광주가 지역구인 양향자 민주당 의원은 “황교안 대표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라며 “(통합당이) 기왕 변하는 거 확실히 더 나아가자. 문재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영수회담에서 광주 5ㆍ18과 대구 2ㆍ28을 모두 헌법 전문에 담겠다는 논의를 해 달라”고 했다.

민주당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한 이원욱 의원은 “미래를 향한 다짐, 그리고 실천 없는 무릎 꿇기는 쇼에 불과하다”며 “5ㆍ18 역사왜곡처벌법을 제정할 것인가. 5ㆍ18 정신을 헌법에 반영할 것인가. 5ㆍ18 망언으로 깊게 베인 광주 시민들의 상처는 보이지 않는가. 김 위원장은 그 물음에 답하라”고 했다.

김기정 기자 kim.ki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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