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법무부장관 승인받고 수사하라는 청와대의 오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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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윤석열 검찰총장이 ‘강골 검사’의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박근혜 정부 때 국정원 댓글사건 수사를 밀어붙이면서다. 당시 검찰 출신의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수사팀의 태도가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검찰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감안해 간여를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국무위원인 법무부 장관이 수사에 참견할 경우 정권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사건이 불공정하게 처리되고 있다는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 등 수사 말라는 의미 #법치주의 위해 시행령 독소 조항은 손질해야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검찰 수사에 대한 외압 논란을 야기했다며 황 장관과 청와대 민정수석 등의 사퇴를 요구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최근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을 조정하면서 마련한 시행령은 ‘과연 이 정부가 생각하는 개혁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점을 갖게 한다. 시행령에 따르면 검사가 수사를 개시할 수 있는 대상은 ▶4급 이상 공직자 ▶3000만원 이상 뇌물을 받은 사람 ▶마약 밀수범죄 등이다. 3급 이상 공직자에 대해선 새로 만들어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맡게 돼 검찰은 사실상 공직자 부패 범죄에서 손을 뗄 처지에 놓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국가나 사회적으로 중대하거나 국민 다수의 피해가 발생하는 사건에 대한 수사를 개시할 경우 검찰총장이 법무부 장관의 승인을 받도록 한 점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투명하고 치우침 없는 수사를 강조했던 것이 이 정권이었다. 적폐 수사를 빌미로 검찰이 과거 정부 사람들을 몰아칠 때 검찰의 독립을 그토록 강조해 오던 사람들이 갑자기 법무부 장관의 사전 승인을 요구한 것은 또 다른 속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야당은 물론 검찰 내에선 “정권 후반기 검찰의 사정(司正)을 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만약 법무부 장관에게 수사 개시에 대한 사전 승인권이 있었다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 사건이 가능했을까. 이 정부의 아킬레스건이 돼버린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은 물론 유재수 전 부산시 부시장에 대한 수사가 이뤄질 수 있었을까. 이러고도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해 눈치 보지 말고 과감하게 수사해 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임명된 이후 검찰과 법무부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공정성 시비가 일고 있다. 서로의 정치적 성향과 처한 위치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순 있다. 하지만 수사기관의 수사는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이뤄져야 한다. 법무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 수사하라는 것은 과거 독재정권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정권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윤 총장이 밉다고 법무부 장관이 수사에 참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것이야말로 이 정부가 오만하다는 증거다. 악법이 될 소지가 큰 조항은 싹이 트기 전에 잘라내야 한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시행령은 법치주의를 위해서라도 손질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