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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바둑사랑 남달랐던 우전 신호열과 청명 임창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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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한문학의 대가 우전(雨田) 신호열 선생(1914~1993)의 연희동 댁을 소설가 김성동씨와 함께 찾아간 일이 있다. 우리 고유의 순장바둑에서 순장을 한문으로 어떻게 쓰는지 궁금해서였다. 順將이냐, 巡將이냐.

옛 선비처럼 운치 즐긴 한학 대가 #상품으로 글씨 걸고 대회 열기도

선생은 어느 걸 써도 상관없다고 했다. 굳이 정하라면 자기는 巡將을 지지한다고 했다. 선생은 방안에서 바둑판을 번쩍 안고 나왔다. 고색창연한 그 판에 순장바둑의 17개 돌을 늘어놓고 바둑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학처럼 고고하던 선생의 모습이 즐거운 어린아이처럼 변했다.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나는 선생이 현대바둑 초창기에 일본에서 돌아온 무적의 신흥고수 조남철과 자웅을 겨루던 순장바둑 국수였다는 사실을 이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학문이 깊은 선생이 바둑 이야기에 왜 이렇게 들뜬 모습을 보이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점은 지금도 부끄럽게 생각한다. 많은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기 때문이다. 선생은 몇 년 후 세상을 떠났다.

전남 함평 출신인 선생은 어려서 당대 최고수인 경남 함양의 노사초 국수를 찾아가 바둑 한판을 두었다. 노사초 국수가 그를 꽉 붙들었고 함께 전국을 일주하기도 했다. 동아일보가 주최한 1기 국수 제1위전에서 조남철, 김명환, 김봉선과 함께 최종 4인에 들었다. 리그전을 벌인 결과 조남철 5단이 3승으로 우승했고 신호열 2단이 2승 1패로 준우승했다. 대회 이름이 국수전 아닌 국수 제1위전이 된 것은 참가 선수들이 모두 ‘국수’였기 때문이다.

선생은 이 대회 이후 본업인 학문으로 전격 귀환했다. 수많은 교수들이 사간동 선생의 자택을 찾아가 배웠다. 그중엔 선생에게서 서예를 배우며 평생의 지기가 된 판소리 명창 김소희씨도 있다. 제자 중 말단임을 자처하는 최원식 인하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국문과에서 고전을 공부한 사람치고 그분한테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다. 대학자고 명필이고 천재이셨다. 매번 무릎을 치게 만드는 참으로 놀라운 분이었다”고 회고한다. “조남철 9단이 1년에 한 번쯤 선생의 모임에 찾아와서 바둑과도 관련이 있는 줄은 알았다. 하지만 우전 선생이 그토록 고수였다는 사실은 잘 몰랐다.”

한학에서 대중적으로는 신호열 선생보다 더 널리 알려진 청명(淸溟) 임창순 선생(1914~1999)도 바둑애호가였다. 선생은 교수 시절이던 4·19 때는 대학시위를 주도했고 통일 운동에 참여하며 옥고도 치렀지만 한학연구의 공로로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선생은 TV에 나가 한문을 강의하는 등 대중 보급에도 앞장섰다. 바둑을 무척 즐겼고 경기도 마석에 설립한 지곡서당에서 매년 바둑대회를 열었다. 수제자라 할 연세대 철학과 이광호 교수와 미술평론가 유홍준, 정치인 유인태 등도 참가했다. 서봉수 9단과 장수영 9단이 가끔 무보수 심판으로 참관했다. 유홍준은 선생의 글씨를 ‘숨은 보석’이라며 최고로 평가했는데 대회 우승상품은 바로 선생의 글씨 한점이었다.

선생은 거의 매일 만나던 바둑친구가 숨지자 불과 6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놀이를 좋아하고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던 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금기서화(琴棋書畵)가 일반적이지만 금기서화시주다(琴棋書畵詩酒茶)도 있다. 옛 선비들의 운치 있는 세상에 바둑은 언제나 끼어있었다. 하지만 ‘풍류’란 두 글자는 프로바둑 세계에선 오래전에 사라졌고 아마추어 동네에서도 종적을 감춘 듯 보인다. 바둑에 대한 묵직한 찬사 들도 AI의 등장과 함께 공허해졌다.

하지만 바둑판은 승부의 무대보다는 인생의 축소판일 때 보다 빛이 난다. 바둑은 저 홀로 떨어지지 말고 외부 세상과 끊임없이 통해야 한다. 금기서화란 네 글자가 좋지 아니한가. 오늘 바둑을 좋아했던 두 분 한학의 대가 신호열 선생과 임창순 선생을 추억해본 이유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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