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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 남대문에서 동대문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난번 국제학회를 마치고 손님들의 요청에 따라 저녁 만찬 후 동대문시장을 안내했다.

이튿날 조찬, 미국 동료 둘이 멋진 양복을 입곤 뽐내며 나타났다.

"어젯밤 산 거구나. "
"천만에. " 맞춤 양복이라는 것이다. 아니, 그 시간에? 하긴 나도 놀랐다.

그 뿐인가. 가봉을 기다리는 동안 차 대접도 받고 오늘 새벽 호텔까지 배달이 됐다니! 그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 짧은 시간에, 신속.친절.정확.택배, 거기다 값도 싸고. 놀랍게도 이 집만이 아니다.

그 거대한 쇼핑몰이 24시간 연중무휴로 돌아간다니, 이건 상상을 초월한다. 이 지구상에 이런 곳은 없다. 그 부지런함이라니, 한국 경제가 그냥 되는 게 아니다. 여길 보니 한강의 기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의 놀라움과 부러움, 그리고 흥분은 한참을 계속됐다.

이튿날은 남대문엘 갔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명동을 거쳐 을지로.청계천을 엇비슷이 내려가 동대문까지 불과 5리도 안되는 이곳이 한국 유통 상가의 대동맥을 이루고 있다.

없는 게 없다. 여기가 잘 돌아가야 우리 경제가 상승기류를 탄다. 이곳에 불이 꺼지면 짙은 먹구름이다.

여기가 언제나 흥청거리게 해야 한다. 그 책임은 시장 상인들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다. 이젠 온 세계 손님들이 몰려들어 관광 쇼핑의 메카가 됐다.

우리가 얼마나 부지런하고 친절한지, 앞서가는 감각, 질 좋고 값싸고, 세계 누구 앞에도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게 됐다.

모두들 곤히 잠든 새벽 시간에도 그 많은 사람들이 구슬땀을 흘려 이룩한 것이다. 고맙고 자랑스럽다.

하지만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도 있는 법. 이들의 건강과 가정이 걱정이다. 이 곳의 생활환경은 최악이다. 불과 한 두평 남짓한 가게, 돌아설 틈도 없다.

먼지, 냄새, 소음, 치열한 경쟁, 새벽까지 손님에게 시달리는 극심한 스트레스, 생활 리듬도 난조다.

24시간 돌아가려면 한 가게에 4~5명은 있어야 하지만 대개는 부부가 교대 근무다. 수면.휴식이 절대 부족이다. 거기다 휴식공간 하나 없다. 숨이 막힌다. 식사를 차분히 앉아 할 수도 없고 운동량도 턱없이 부족하다.

전문의가 아니더라도 이들의 건강상태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신경성 위장병은 거의 필수다.

두통.불면.만성피로.관절통... 훈장처럼 따라 다닌다. 여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정말 걱정은 집에 있을 아이들이다.

부모가 멀쩡히 있는 데도 소년소녀 가장이 될 수밖에 없다. 시장엔 밤이 없으니 아이들 얼굴 볼 시간이 없다. 제발 문제아가 안돼야 할텐데, 하늘을 보고 빌어 볼 수밖에 없다.

불행히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도 많은 환자가 여기에서 온다. 자신의 건강이나 아이들 문제로 근심스런 얼굴로 찾아오는 걸 보노라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

살아 보겠다고 그렇게 열심히, 잠도 안자고 일한 보람이 겨우 이건가.

이제사 자리가 잡히고 생활도 안정되나 싶었는데 병이라니, 문제아라니, 어렵게 일군 모든 게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듯 망연자실이다.

더 이상 이대로 둘 순 없다. 본인은 물론이고 시장조합.빌딩관리실.행정당국 모두가 중지를 모아야 한다. 이들이 건강해야 우리 경제가 튼튼하다. 휴식공간을 비롯, 휴식시간.휴가까지 제도적으로 마련돼야겠다.

그리고 가까이 아이들을 맡길 수 있는 시설도 있어야 한다. 이건 필수다. 이상 더 '버려진 아이' 로 두어선 안된다. 얼마 전 을지로 삼풍빌딩에 새로 문을 연 체력단련 시설이 참으로 반가웠다.

꼭대기층.옥상 전체를 쓰도록 해준 그 빌딩 주인의 배려도 존경스럽다. 어린이집도 마련됐으면 하는 건 욕심이겠지. 이런 건전시설이 계속 들어서 손쉽게 이용할 수 있어야겠다.

작은 공원이야 꿈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이곳을 보니 빌딩 옥상을 잘 가꾸어 휴식공간.운동시설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세금 거둘 생각이나 하지 말고, 그리고 문외한의 생각이라 웃지 말고 신중히 연구해주길 바란다.

이 나라 유통시장의 대동맥에 동맥경화증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유통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이미 그런 징조가 보인다. 중증이 되기 전에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예방치료 대책이 나와야겠다. 지난 설 연휴, 좀 쉴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시형 <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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