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곳이 5곳으로 줄어들었다···‘적자’ 정유, 일본식 구조조정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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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석유 메이저사인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은 최근 직원 1만명을 줄이고, 재생에너지 분야로 전환을 가속한다고 밝혔다. 이 회사 전 직원의 15%에 달하는 수치다. 또 운영비도 25억 달러(약 3조300억원)가량 줄인다는 목표다. BP가 본격적인 사업 재편에 나서는 건 글로벌 석유 소비가 줄고, 수익성까지 나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SK에너지 울산CLX 공장. [사진 SK이노베이션]

SK에너지 울산CLX 공장. [사진 SK이노베이션]

2분기에도 대규모 적자 불가피 

저유가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수요부진 등으로 어려움에 빠진 정유업계 내부에서 본격적인 산업구조 재편이 필요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 에쓰오일과 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정유 4사들은 정기보수 등을 통해 생산량을 사실상 줄여 놓은 상태다. 보수 기간 중엔 조업을 중단하기 때문이다.

업계 1위인 SK이노베이션의 경우 이달 말까지 정기보수를 한다. 이를 통해 하루 15만 배럴가량의 생산을 줄였다. 이 회사 생산캐파는 하루 111만5000배럴이다. 문제는 정유업체들의 정기보수가 마무리된 다음에도, 기존 생산량만큼 공장을 가동할지 여부다.

과거엔 공장을 돌리는 대로 돈이 됐다. 하지만 현재는 사정이 달라졌다. 한 예로 배럴당 정제마진은 -0.4달러(6월 둘째 주 기준)에 그친다. 정유업계에서는 ‘정제마진 배럴당 4달러’를 손익분기점으로 본다.

정제마진 추이.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정제마진 추이.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사정이 이러니 정유업체들은 올 2분기에도 대규모 적자를 낼 것이라 우려한다. 익명을 원한 정유업체 관계자는 “정유 4사 모두 1분기 만큼 실적이 나쁘진 않겠지만, 2분기 역시 적자를 보는 건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1분기 정유 4사의 영업손실 규모는 총 4조3775억원에 달했다.

일본 정유업계는 지금도 구조조정 중 

사실 글로벌 정유시설은 이미 포화상태다. 중동과 중국 등을 중심으로 정유시설들이 꾸준히 신ㆍ증설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정유업체들에는 수출시장 감소를 의미한다. 시장조사기관인 IHS에 따르면 지난해 하루 9913만6000배럴이던 글로벌 석유제품 생산량은 오는 2023년에는 1억430만 배럴에 이를 것이란 전망이다.

정유업체별 생산능력.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정유업체별 생산능력.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그래서 일본과 비슷한 과감한 수준의 정유업계 구조조정이 필요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과거 일본 정유업계는 소규모 업체의 난립과 내수 시장 중심의 경쟁으로 인해 급격하게 쇠락했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석유산업 합리화’를 목표로 정유업계 구조조정을 주도했다. 업체 간 인수합병을 유도해 대형화를 추진하고, 각 정유사에 정제설비 고도화 등을 요구했다.

한때 17개에 달했던 일본 내 정유사는 현재 5개사로 재편됐다. 한국 정유업체 등에 밀리던 경쟁력 역시 어느 정도 회복했다. 또 지난해에는 ‘새로운 석유 산업상에 관한 연구회’를 설치해 생산성 향상과 경쟁력 강화를 돕는 것은 물론 바이오 연료나 e-fuel 등에 대한 연구도 진행 중이다. 최근엔 호주 등으로 수출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반면 한국 정유업체들은 뒷걸음질 치고 있다. 한 예로 지난달 석유제품 수출은 전년 동기보다 68.6%가 줄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휘발유와 항공유 등 석유 수요가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니 정유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광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정부가 정유업계와 관련해 유류세 등 세금에만 치중한 정책을 펴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과거와 같은 정부주도형 산업합리화 조치는 어렵겠지만, 보다 적극적인 관점에서 시장의 변화에 맞춰 업계의 진화를 이끌어주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기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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