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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성좌의 게임…보수재집권 시나리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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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4호 31면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요즘 ‘급’ 궁금해지는 게 있다. ‘지금 이 시대 한국인은 누구인가’라는 의문이다. 총선 직후 “드디어 나의 전략이 맞아 들어가고 있다”며 여당이 압승한 총선 결과에 환호하는 한 지인을 보면서 생긴 궁금증이다. 골수 보수파 인사가 느닷없이 건국 이래 최대의 ‘보수 참패’ 결과에 환호하다니.

보수를 위해 여당에 투표한 유권자 #코로나19로 선진 시민 자신감 얻어 #보다 냉정해진 유권자들의 셈법에 #실력 증명한 정치인만 살아남을 것

황당했던 건 그도 이번 선거에서 여당에 표를 던졌다는 고백이었다. 그 이유는 더 황당했다. 이 모두가 ‘보수 재집권 시나리오’의 첫 단계라는 것이다. 평생 골수 보수인 그의 눈에 총선 전의 미래통합당으로선 도무지 답이 없어 선택한 고육책이라고 했다.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를 겪었으면 진심으로 반성하는 척이라도 하고 폐족들은 물러나야 하는데도 여전히 친박·비박 간의 배신자 프레임 논란이나 벌이는 정당. 코로나19 사태 이후 전 세계가 한국 대응을 칭찬하는 와중에 ‘정권 심판론’ 외에는 앞세울 어젠다도 없는 데다 돌려막기 공천에 후보자 막말 파동까지 겹치는 걸 보면서 ‘저들이 당권을 잡고 있는 한 대한민국 보수는 영원히 망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로 난생처음 진보에 표를 던졌는데, 뜻밖에도 개헌을 빼곤 다 할 수 있는 ‘절대 국회’가 탄생한 것이다. 그는 “이젠 민주당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야당이 발목을 잡아 아무것도 못 한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이젠 그들의 진짜 실력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당투표율에서 미래통합당의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이 가장 높은 득표율(33.84%)을 보인 점을 들어 우리 국민이 보수에 대한 마음마저 접은 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대로 보수가 잘만 개혁하고, 진보가 오만해진다면 차기 대선, 혹은 차기 총선의 승리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도 분석했다.

그의 말은 ‘투표란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자에게 표를 주는 행위’라는 기존의 단순한 생각에 큰 균열을 가져왔다. 한국 유권자들은 나름의 전략과 셈법으로 투표를 통해 정치를 조종하려는 단계로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몇몇 젊은이들에게 이 사례를 얘기하며, 그들 투표의 기준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선데이칼럼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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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 친구는 “이번 선거는 일종의 ‘성좌의 게임’ 같은 느낌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보수나 진보 양 진영에 특별히 더 큰 호감이나 지지의 의사가 없다고 했다. 그저 상대적으로 나아 보이는 쪽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개인적으론 ‘성좌의 게임’이라는 말에서 턱 막혔다. 요즘 웹소설 ‘성좌물’에 나오는 게임이라는데, 설명만으론 이해할 수 없어서 결국 웹소설 사이트에 가입해 소설 하나를 대략 읽은 후에야 겨우 감을 잡았다.

이는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의 전쟁터가 된 지구를 다른 우주의 성좌들(여러 능력을 갖춘 관객)이 중계방송으로 보면서 생존자들을 게임의 플레이어로 놓고 특정 선수에게 자기 능력치를 빌려주거나 판돈을 걸면서 살육전을 즐긴다는 설정이다. 말하자면 트로이 전쟁에서 올림포스의 신들이 사소한 분노나 변덕 때문에 수시로 전쟁에 개입해 양상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일리아드’의 현대판 버전이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어쨌든 지난 총선의 관전평이나 주변 지인들의 변화를 보면서, 정치를 대하는 국민 유권자들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정치권 사람들은 ‘아스팔트 보수’나 ‘조국 수호대’ 같은 극렬한 정치 지향성 군중의 목소리가 민심을 대표한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정치의 지형을 바꾼 것은 멀찍이 앉아서 누구에게 걸지 판돈을 만지작거리는 ‘성좌 같은 유권자’들이었다. 성좌들은 사소한 조짐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식상한 상상력과 부실한 실력엔 가차 없이 패널티를 매기고, 게임 하나가 마무리되면 순식간에 지지를 철회거나 베팅하는 선수를 바꾼다. 이런 판국이니 국회에 입성한 정치인들은 생사를 건 플레이로 성좌들을 만족시켜야 베팅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도록 갚아주겠다”(최강욱, 열린민주당), “윤 총장이 직권을 남용하고 있다”(김용민, 민주당), “검찰개혁을 완수하겠다”(황운하,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마자 ‘내 편 안 든 검찰부터 손 보겠다’는 으름장으로 시작한 범여권의 식상한 상상력은 정말 ‘세상 바뀐 줄 모르는’ 그들의 현주소를 보여줬다.

보수가 성하면 ‘부패’하고, 진보가 성하면 ‘무도’해진다는 건 역사의 교훈이다. 요즘 범여권 일각에선 무도의 조짐이 나타나고, 한편으론 자제의 목소리도 나온다. 어느 방향으로 갈지 아직은 좀 더 지켜볼 일이다.

하나 이젠 우리에게도 믿는 구석이 있다. 바로 ‘시민정신의 각성’이다. 공교롭지만 우리는 코로나19의 팬데믹 이후 비로소 우리가 일류 선진 시민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개도국의 열등감은 후진 정치만 보면서 가졌던 일종의 관성이었던 것이다. 이번 총선 결과는 이러한 관성으로부터의 탈피, 자신감으로 무장한 시민들의 ‘베팅’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정치권도 시민 수준에 걸맞은 실력을 보여줘야 할 거다. 실력을 증명하는 자들만이 살아남는 게임이 시작됐다.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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