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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스토킹 신고···경찰은 "피해없으니 다행" 범칙금 8만원 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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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안 찾아온 것을 다행으로 알아라. 직접적 피해가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다"

5년 간 의문의 남성에게 스토킹 피해를 입은 박모(22)씨가 경찰서로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자 경찰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박씨는 “피해자가 위협을 느끼는데도 경찰은 직접적 피해가 있어야 적극적으로 수사에 협조해준다는 식이었다”며 “만약 피해를 입었다면 신고하기 전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스토킹 범죄의 입법 공백으로 피해자들이 고통받고 있다. 특정인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스토킹’ 행위는 피해자에게 공포심을 유발하지만, 정작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지난해 9월부터 6개월간 스토킹 피해를 입었다는 이모(24)씨는 “상대가 느닷없이 직장이나 집 앞에 찾아오거나 시시때때로 문자를 보냈다”며 “이별 후 흔히 남자가 여자에게 매달리는 장면이라는 주변 인식 때문에 처벌은커녕 경찰에 신고하기도 어려웠다”고 밝혔다.

조혜연 9단 “처벌 미약하다”

프로 바둑기사 조혜연(35)씨도 스토킹 피해를 신고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앞서 조씨는 40대 남성 정모씨가 지난해부터 자신이 운영하는 바둑 학원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 건물 벽에 낙서하는 등 스토킹을 해왔다며 이달 17일 정씨를 고소했다.

조씨의 바둑아카데미 관계자는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정씨가) 술에 취한 채 학원에 지속적으로 찾아와 건물 외벽에 모욕적인 말과 욕설을 남겼다”면서 “30분마다 세 번씩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 측에서) 별 게 아니라는 듯 처음엔 신경도 안 썼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 보도가 나니까 부랴부랴 조사가 진행된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여성 프로바둑기사 조혜연 9단을 약 1년간 스토킹 한 혐의를 받는 40대 후반 정모씨가 벽에 도배한 글. [바둑아카데미측 제공]

여성 프로바둑기사 조혜연 9단을 약 1년간 스토킹 한 혐의를 받는 40대 후반 정모씨가 벽에 도배한 글. [바둑아카데미측 제공]

이에 지난 23일 조씨는 청와대 청원글을 올려 “(정씨가) 연속으로 나타나 갖은 욕설과 고함 및 모욕을 했다”며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현행 스토커 처벌법이 너무 경미하고 미약한 처벌을 해서 아닌가 싶다”고 글을 적었다. 그러면서 “국회 차원에서 스토커 처벌법을 강력 범죄로 다뤄줬으면 한다”고 촉구했다.

스토킹 처벌법 제정, 10년 넘게 제자리

스토킹 처벌 관련 법안은 1999년 15대 국회에서 처음 ‘스토킹 처벌에 관한 특례법안’으로 발의됐다. 이후 20대 국회까지 총 14차례 발의됐지만 단 한건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18년 5월 법무부도 ‘스토킹 처벌법’ 제정안을 입법 예고했지만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스토킹 행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등을 두고 부처 간 조율이 안 됐다는 이유에서다.

장기간 법안이 방치되어온 까닭에 현행 법체계에선 스토킹 범죄를 처벌할 규정을 찾기 어렵다. 2013년 경범죄처벌법에 신설된 ‘지속적 괴롭힘’ 조항이 유일하다. 범칙금은 8만원에 불과하다. 암표 매매 적발 시 부과되는 범칙금(16만원) 절반 수준밖에 안 되는 액수다.

이에 ‘스토킹처벌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스토킹을 단순 구애 행위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며 “꽃을 보내거나 전화하는 행위를 따져가며 스토킹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스토커 입장에서 접근하는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피해자가 공포심을 느끼면 해당 행위를 지속해서는 안 된다”며 “영미권처럼 피해자의 안전권을 보장하는 식으로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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