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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칼럼

일하는 국회, 민주당에 달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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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4·15 총선에서 역사에 남을 압승을 거두고도 민주당이 부자 몸조심하듯 바짝 몸을 낮추는 모양새다. 코로나 국난 탓이기도 하겠지만, 승리의 함성도, 떠들썩한 축배도 없다. 당 지도부도 겸손 모드를 강조하고 있다. 이해찬 당대표는 민주당 당선인들에게 “더 겸손한 자세로 민심을 살피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180 의석 지닌 수퍼 여당 탄생 #일하는 국회 만들 수 있는 시간 #욕심 줄이고 통합의 정치 하면 #방역 이어 정치 선진국도 가능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의 역풍을 타고 과반의석이 넘는 152석을 차지했다. 이를 발판으로 열린우리당은 국가보안법 폐지, 사립학교법 개정, 과거사법 제정, 언론관계법 개정 등 ‘4대 개혁 입법’을 밀어붙이다 ‘폭망’했다. 2006년 지방선거와 2007년 대선에서 연달아 패배하고 ‘폐족’으로 전락했다. 그 때의 교훈을 잊지 말자는 게 이 대표가 겸손을 강조한 취지일 것이다.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 의석까지 합쳐 민주당은 국회 의석의 5분의 3인 180석을 확보했다. 개헌 빼고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수퍼 여당이 된 것은 기회인 동시에 부담이다. 이제까지는 엇비슷한 의석수에 기대어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야당 탓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제 더는 그런 핑계가 통하지 않는다. 숫자의 힘을 믿고 밀어붙이다 일이 꼬이거나 잘못되면 책임은 고스란히 여당이 져야 한다. 권한과 책임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번 총선을 통해 명실공히 민주당의 간판급 대선주자 반열에 오른 이낙연 전 총리가 “싸우는 국회를 일하는 국회로 바꿔 저급하고 소모적인 삼류 정치를 생산적이고 품격 있는 일류 정치로 바꾸겠다”고 포부를 밝힌 것은 고무적이다. 180석 의석은 여당의 숙원을 현실화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 자산이자 동력이다. 그 힘을 함부로 사용하는 대신 절제와 균형으로 협력과 통합의 정치를 구현한다면 집권당의 압승으로 끝난 이번 총선은 싸움만 하는 고비용·저효율 국회를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토론이 가능한 진정한 민의의 전당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민주당은 일하는 국회를 위한 국회법 개정을 마땅히 21대 국회의 첫 번째 개혁 과제로 삼아야 한다. 민주당의 총선 공약이기도 한 ‘일하는 국회법’은 국회의 공전 사태를 방지해 놀고먹는 국회라는 오명을 씻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를 위해 상시 국회 운영체제 도입, 상임위원회 운영 의무화 등을 국회법에 담겠다는 것이다. 정당한 사유 없이 회의에 불참하는 의원의 세비를 불출석 비율에 따라 10%에서 30%까지 단계적으로 삭감하는 페널티 조항도 포함됐다.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도입, 국민 입법청구 제도 마련, 국회 윤리위원회 강화도 예고하고 있다. 싸우더라도 국회 안에서 싸우자는 것이고, 토론을 통한 설득과 타협의 정치를 규범화하자는 취지다.

일하는 국회를 위한 국회법 개정에는 누구도 반대하기 어렵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버릇이 돼 걸핏하면 국회 보이콧과 장외투쟁을 일삼는다는 여론의 따가운 비판이 통합당의 총선 참패 요인 중 하나인 점을 생각하면 통합당으로서도 반대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 여야는 새 국회가 개원하는 대로 국회법 개정을 통해 일하는 국회의 기틀을 마련하고, 코로나 사태의 사회적, 경제적 파장을 최소화하는 데 힘을 합치는 모습부터 보여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차기 국회의장의 거중조정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힘이 있으면 쓰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마련이다.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의 남은 2년 임기 동안 검찰·언론·노동·재벌·교육·국방 등 분야 별로 못 다한 개혁 과제를 마무리하고 싶은 욕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무리하게 밀어붙이면 탈이 나게 돼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열린우리당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욕심을 내려놓고 현실적으로 타협 가능한 개혁 법안부터 야야 합의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전 세계적 위기 속에 한국의 ‘주가’는 오히려 올라가는 역설적 상황이다. 봉쇄와 이동제한을 하지 않고도 대규모 확산을 막은 한국 같은 나라가 진짜 선진국이라는 외국 언론의 평가가 줄을 잇고 있다. 이번 사태를 거치며 국민의 65%가 우리나라를 선진국이라고 느끼게 됐다는 여론조사도 있다. 한국 국민이어서 다행이라는 응답 비율도 64%다. 방역과 더불어 경제에서도 선방한다면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코로나 이전과 이후가 크게 달라질 것이다.

60%의 의석을 가진 거대 여당의 탄생은 1987년 민주화 이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지(未知)의 영역이다. 이 기회를 제대로 살려 일하는 국회를 만들어 낸다면 방역 선진국에 이어 정치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도 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유권자들은 정권심판보다 국정안정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멍석을 민주당에 깔아 줬다. 그런데도 구태의연한 진영 논리에 사로잡혀 국회 선진화와 정치 선진화의 호기를 살리지 못한다면 국민은 다음 선거에서 야당보다 민주당에 온전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이제 민주당 하기에 달렸다. 더이상의 핑계거리는 없다.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