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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법 바꾸면 신호등없는 횡단보도에 사람만 보여도 차가 멈출까

중앙일보

입력

정부가 무신호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서있기만 해도 차량이 정지토록 법 개정을 추진한다.[중앙포토]

정부가 무신호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서있기만 해도 차량이 정지토록 법 개정을 추진한다.[중앙포토]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보행자가 '통행하려고 할 때'에도 차량 일시 정지."

정부, 교통사고 사망자 감축 대책 발표 #"무신호 횡단보도,사람 서있으면 정지" #지난해 횡단보도 실험에선 정지율 2.5% #"취지 좋지만 단속 방안 등 준비도 필요" #

 정부가 교통사고 사망자를 오는 2022년까지 2000명대로 줄이겠다며 밝힌 '교통사고 사망자 줄이기 대책'에 포함된 내용이다. 9일 정부가 발표한 이 대책은 ▶보행자 우선 교통체계로 전환 ▶교통약자 안전환경 조성 ▶ 운전자 안전운전ㆍ책임성 강화 ▶예방적 도로교통 인프라 개선ㆍ확충 ▶교통 안전문화 확산ㆍ추진체계 강화 등을 담고 있다.

 도심부 제한속도를 시속 60㎞에서 50㎞로 낮추고, 이면도로는 시속 40㎞에서 30㎞로 낮춰 사고를 줄이고 보행자를 보호하자는 '안전속도 5030'을 전국 도시 지역에 연내 조기 정착시키겠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정부는 특히 보행자 보호를 위해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보행자가 길을 건너려고 할 때도 차량이 일시 정지토록 의무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도로교통법을 연말까지 개정키로 했다. 현행 도로교통법에는 횡단보도에서 보행자가 '통행하고 있을 때' 만 차량이 멈추도록 규정하고 있다.

 최근 3년간(2016년~2018년) 발생한 ‘횡단 중 사고’는 모두 7만 594건이었으며 사망자는 2853명이었다. 이는 전체 차대 사람 사망자 중 60.4%나 되는 수치다. 법 개정은 이를 줄이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한창훈 경찰청 교통안전과장은 "주요 선진국에서는 이미 시행하고 있다"며 "법 개정을 통해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도 운전자들에게 보행자 보호 의무를 더 부여하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보행자가 횡단보도에 접근만 해도 차량이 우선 정지하는 문화가 많이 정착돼 있다. 하지만 국내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이는 지난해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실시한 실험 결과에서도 입증된다.

 공단은 지난해 8월 6일과 9일 청주시와 대전시의 왕복 4차로 도로에 있는 무신호 횡단보도에서 보행자가 길을 건너려고 할 때 차량이 정지하는지를 확인했다. 그 결과 제한속도가 시속 30㎞인 도로에서는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40번의 시도 중에서 차량이 정지한 경우가 8번(20%)이었다.

 반면 시속 50㎞인 도로에서는 40번 중 겨우 1번만 차량이 멈췄다. 양보 비율이 겨우 2.5%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횡단보도에 도착해서 횡단을 시도하려는 때부터 실제로 횡단을 시작하기 직전까지 걸린 시간(대기시간)은 시속 30㎞ 도로에서는 평균 14초였지만 시속 50㎞ 도로에서는 대기시간이 평균 37.3초나 됐다.

무신호 횡단보도에서는 보행자를 위해 차량이 정지하는 경우가 드물다. [KBS 화면 캡처]

무신호 횡단보도에서는 보행자를 위해 차량이 정지하는 경우가 드물다. [KBS 화면 캡처]

이처럼 보행자에 대한 운전자의 배려나 양보가 없는 상황에서 법 개정만으로 상황이 나아질지는 미지수다. 전문가들은 일단 정부의 법 개정 방향에는 긍정적인 반응이다.

 한상진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시행에 어려운 면이 있겠지만, 이제라도 시작해야 문화로 정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고준호 한양대 교수도 "보행자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기 위한 조치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법 개정 이후 해당 규정이 현장에서 제대로 적용되도록 하기 위한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상진 위원은 "선진국에서도 문화가 정착되기 이전에 횡단보도에서 보행자 사고가 나면 처벌을 상당히 강하게 했다"며 "우리도 법 개정 추진 단계에서부터 효과적인 단속방안 등에 대한 고려와 준비를 함께 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고준호 교수는 "우리의 운전문화를 고려했을 때 단순히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차량이 정지하기에는 아직 미흡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며 "모든 무신호 횡단보도에서 한꺼번에 시행하는 것보다 우선 등하교시간대 초등학교 주변, 노인보호구역 등에 시행하고 점진적으로 확장하는 게 효과적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kks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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