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9호 피해자의 헌법소원… 헌법재판소는 ‘합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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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연합뉴스]

헌법재판소. [연합뉴스]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피해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개별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피해만을 배상하도록 한 국가배상법 조항은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헌재는 “구제가 필요하다면 별도로 배상을 명하는 입법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의견을 밝혔다.

헌재는 26일 긴급조치 9호 위반 등 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받았던 A씨 등이 국가배상법 2조 1항 등에 대해 위헌 취지로 낸 헌법소원에서 재판관 5대 3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지금은 위법, 그때엔 합법 조치 따랐다면…배상해야 할까?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해 타인에게 손해를 입혔을 때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당시 긴급조치는 ‘위헌’이라는 데서 불거진다. 지난 2013년 위헌 결정이 내려진 긴급조치 1·9호 등은 국민 기본권을 근거 없이 침해해 민주화운동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초법적 조항이다.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 비방과 유언비어 날조·유포 행위 등을 금지했다. 긴급조치 9호는 집회·시위 등 정치활동을 금지했고, 위반자는 영장없이 체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실형을 받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은 최근 재심을 거쳐 줄줄이 무죄가 선고됐다.

박정희 정권 시절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살았던 김부겸 전 행정안전부 장관이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연합뉴스]

박정희 정권 시절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살았던 김부겸 전 행정안전부 장관이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연합뉴스]

긴급조치 9호 위반 등 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받았던 A씨 등도 해당 조항 중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해’ 부분으로 인해 배상이 어려워지자, 국가배상청구권과 평등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위헌 결정이 난 긴급조치법을 따랐다는 이유로 당시 공무원들이 위법성에 대한 고의나 과실이 없다고 본 것은 지나치게 형식논리에 근거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A씨를 대리했던 김형태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는 “당시 긴급조치법은 개별적 법 질서가 아니라 객관적 법 질서 전체에 비춰봐도 위법이 명백하다”며 “‘남을 돕는 자를 사형시킨다’는 ‘엉터리법’ 조항을 따른 공무원이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지 않는가”라고 했다. 이어 김 변호사는 “대법원과 헌재 모두 긴급조치는 위법이라면서 배상 책임에 대한 판단은 국회에 떠미루는 결정을 계속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형태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 [뉴시스]

김형태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 [뉴시스]

헌재 “공무수행 저해될 수도”

헌재의 다수 의견은 해당 법이 합헌이라고 봤다. 이미 같은 조항에 대해 판단한 지난 2015년 결정과 큰 사정 변경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헌재는 “현실적으로 원활한 공무수행이 저해될 수 있어 이를 입법·정책적으로 고려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이번 사건에서도 “과거에 행해진 법 집행행위로 인해 사후에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되면 국가가 법 집행행위 자체를 꺼리는 등 소극적 행정으로 일관하거나, 행정의 혼란을 초래해 국가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못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며 선례를 변경하지 않았다.

대신 헌재는 “국가배상 책임의 일반적 요건을 규정한 해당 조항이 아니라 국민적 합의를 토대로 입법자가 별도의 입법을 통해 (피해를) 구제하면 된다”는 의견을 내놨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재판관들이 13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국회의원과 국회의장간의 권한쟁의 심판 사건에 대한 공개변론에 자리하고 있다.[뉴시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재판관들이 13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국회의원과 국회의장간의 권한쟁의 심판 사건에 대한 공개변론에 자리하고 있다.[뉴시스]

반대 의견 “불법행위 피해 외면 결과”

김기영·문형배·이미선 재판관은 “헌법에 위반된다”며 반대 의견을 냈다. 김 재판관 등은 “긴급조치를 통한 국가의 의도적‧적극적 불법행위는 우리 헌법의 근본 이념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정면으로 훼손한 것”이라며 “이같이 특수하고 이례적인 불법행위에 대해서도 공무원 개인의 독자적인 고의가 없다는 이유로 배상청구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불법행위를 실제 수행한 공무원은 국가가 교체할 수 있는 부품에 불과했다”며 “국가가 개별 공무원의 행위를 실질적으로 지배한 상태에서 이뤄진 불법행위에 대해 국가배상청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김수민 기자 kim.sumin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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