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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스 “미국 통화블랙홀에 빠져, Fed가 짜낼 즙 안 남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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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로런스 서머스

로런스 서머스

“사실상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서는 더는 짜낼 수 있는 ‘즙’(juice)이 남지 않았다.”

전 미국 재무장관 코로나 위기 진단 #돈 풀어도 미래 불안해 소비 위축 #기업은 돈 쌓아둬 ‘유동성 함정’에 #10년물 국채금리 0.8% 밑도는 상황 #통화 완화, 경기침체 악화시킬 수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충격으로 미국 경제가 본격적으로 ‘블랙홀 통화 경제’에 빠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중앙은행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경기를 부양할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놓인 상황을 말한다. 실제로 Fed가 5년 만에 ‘제로(0) 금리’ 시대로 복귀했다는 소식에 전 세계 주식 시장은 되레 폭락하고 있다.

16일(현지시간)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 재무장관 출신인 로런스 서머스(사진) 하버드대 교수는 “팬데믹(pandemic·세계적 대유행) 메커니즘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어떤 부정적인 충격이 우리를 ‘유동성 함정’에 빠뜨릴 것이라는 사실은 몇 년 전부터 분명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 10년물 국채 금리가 0.8%를 밑도는 상황에서 “쓸 수 있는 통화 정책은 남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런 이유에서 Fed의 적극적인 통화 완화 정책에도 월스트리트의 투자자들은 동요하고 있다고 서머스 교수는 분석했다.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 추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 추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서머스 교수가 지적한 ‘블랙홀 통화 경제’는 초저금리 상황이 지속되며 통화 완화 정책이 더는 먹히지 않는 상황을 의미한다. 시중에 돈을 풀어도 불확실한 경기 전망에 가계는 소비를 줄이고, 기업은 투자를 꺼린 채 돈을 쌓아두는 ‘유동성 함정’에 빠진 것이다.

앞서 서머스 교수는 지난해 9월 트위터에 “미국을 포함한 세계는 저성장·저금리·저물가에 빠진 일본처럼 장기 침체에 직면했다”고 썼다. 경기 둔화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격적인 통화 정책을 펼쳤지만, 국채 금리는 더욱 하락하는 악순환에 빠진 일본의 전철을 세계 경제가 뒤따라 가는 ‘J(일본화) 공포’를 경고한 것이다. 그는 그간 “노인 인구 비중이 커지고, 자동화 기기 발달로 일자리는 감소하고, 부의 양극화가 심화하는 앞으로의 상황이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서머스 교수는 최악의 경우 Fed의 통화 완화 정책이 경기 침체를 악화시키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금리가 내려가면 가계와 기업의 빚이 늘고 자산 가격 상승을 부추겨 거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업의 부채 부담이 줄어들면 구조조정이 미뤄지고, 부실기업의 좀비화가 가속화돼 경제활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했다. 서머스 교수는 “미국은 지난 10년간 장기화된 저금리 정책으로 이미 가계·기업 빚이 역대 최대로 늘고, 자산 가격에 거품이 꼈다는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코로나19의 충격이 세계 증시에 미치는 충격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경제 위기의 상황에서 통화정책의 약효가 떨어진 현실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며 “미 증시가 더 폭락할 경우 그동안 증시가 지나친 유동성 공급으로 과열된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증명될 것”이라고 말했다.

배정원 기자 bae.ju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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