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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이상한 나라의 놀이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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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현 지역에 적 포탄 낙하! 중대장이 외쳤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빛의 속도로 도망쳐 숨어야 한다. 훈련상황이다. 중대장 눈앞에서 얼쩡거리면 군장 메고 연병장 돌아야 한다. 알아서 생존해라. 각자도생. 이건 정글의 법칙이다. 강자들은 결속연대로 생존한다. 약자들은 알아서 살아나가라. 역사는 연대하지 못한 약자들의 처절한 생존 목격담으로 충만한 정글의 연대기다. 우리의 도시가 정글이 아니라면 공정한 생존 장치들 덕분이다. 그러나 공정의 탈만 쓰고 약자에 대한 적극적 배려 없는 규칙이 섞여 배회할 때 도시과 정글은 한 공간에 병존하게 된다. 그 구분선을 계급이라고 부른다.

한국에 형성된 주거계급 사회 #주차장으로 변해버린 골목길 #아이들 놀 공간은 공정하도록 #새 시대의 놀이터 공급해야

주차장법이라는 것이 있다. 주차장의 설치 기준과 조건이 규정된 법규다. 우리의 아파트 외부공간을 정의하는 강력한 법규다. 아파트 건물 사이로 주어진 기준의 주차장을 확보하면 자동차 지상천국의 단지가 완성된다. 자투리 공간에 어린이 놀이터를 구겨 넣으면 된다. 외환위기 직후 건설업계에 아파트 미분양 폭탄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파트 공급업체들이 생존의 승부수를 던졌다. 주차장을 지하에 넣어본 것이다. 이 외부공간의 환골탈태가 대박이었다. 지상공원 아파트를 체험한 사람들은 다시는 주차장 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후 지상주차장 아파트는 심의통과도 어려워졌다. 자동차 걱정 없으니 어린이 놀이터는 훨씬 더 좋아졌다. 그런데 그 놀이터에 큼지막한 빗장이 채워졌다. 외부 주민 이용금지.

지상이건 지하건 아파트 단지의 주차장 설치는 설계 기법상 까다로울 수는 있으나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주차장법은 건축법의 다세대·다가구주택이라는 단어를 만나면서 폭탄법으로 변한다. 건물 전체를 규정한다. 자동차는 빨리 달리는 데는 참으로 유용한 기계다. 그러나 그 외의 관점에서는 황당한 장애 기계다. 직각으로 다니지도, 계단으로 다니지도 못한다. 그런데 필지별 각자도생 주차장 설치. 필지는 작은데 주차장을 알아서 만들어야 하니 경사로가 필요한 지하주차장은 엄두를 못낸다. 결국 이 장애기계가 대지를 선점한다. 지상 1층이 주차장이 된다. 소위 필로티 구조의 건물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지상공간의 보행인용 개방이 원래 필로티의 탄생철학이었는데 한국에서는 그 자리를 자동차가 꿰찼다.

자동차들이 다세대주택촌 골목길을 잠식하자 중대장이 아니고 골목대장들이 멸종위기에 처했다. 서식처 잃고 밀려난 골목대장들이 옆 마을을 기웃거렸을 때 만난 것은 주거계급사회 선언문이었다. 외부 주민 이용금지. 너희끼리 알아서 놀아라. 철조망 내부 아파트의 것도 미끄럼틀·시소·그네의 삼박자를 갖췄기에 놀이터라 불렀지만 놀기 좋은 공간은 아니었다. 더워도, 추워도 문제였다. 미세먼지, 전염병 뉴스에도 맥을 못췄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집안에서 놀 수도 없었다. 층간소음으로 분쟁을 넘어 살인사건까지 보도되는 사회다. 결국 뛰어다녀야 할 아이들은 적 포탄 낙하하는 모니터 속 게임으로 뛰어들었다. 전 세계 최고의 근시아동 양산 사회체계가 갖춰졌다. 근시도 장애다. 대한민국은 육성된 장애인으로 충만한 국민개병 국가인 것이다.

자본주의는 과연 민첩하여 키즈키페라는 걸 만들었다. 아이들은 재미있는 놀이기구들에서 체력방전 때까지 놀 수 있다. 어른들은 옆에서 음료수 마시며 한담하면 된다. 그런데 정교한 이용계량 방식에 따라 요금 지불할 크레딧카드가 필요하다. 짐작대로 최저요금은 최저임금 이상이다. 수저색깔이 아이들 노는 데 차별 기제로 작동한다면 그 사회는 뇌관 즐비한 미래를 만날 수밖에 없다. 이 사회의 미래가 정글이 아니라면 아이들이 부모의 경제력과 관계없이 뛰어서 놀 수 있는 공간을 지금 제공해야 한다. 그 놀이터는 미끄럼틀 던져놓고 이름만 붙여놓은 지난 시대의 것과 달라야 한다는 게 키즈카페의 증언이다. 계급철폐가 사회가 건강하게 존재하는 길이라는 게 역사책의 증언이다.

아동복지법이 있다. ‘지역아동센터’와 ‘우리동네키움센터’도 있다. 이들의 눈높이는 어른이다. 아이들을 마음대로 뛰어놀 주체가 아니고 돌볼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새로운 공간이 필요하다. 공공도서관은 미국의 대표적 시민육성 공간이다. 카페는 프랑스 왕정을 뒤집은 담론유통 공간이다. 놀이터는 미래 시민들이 사회성을 키우는 공간이다. 도서관이면서 카페면서 체력방전 요구하고 보장하는 화끈한 놀이터가 합쳐진 그런 건물이 이 도시에 필요하다. 아이들, 부모들이 섞여 모여 놀고 수다 떠는 공간이겠다. 그런 곳이 저소득층 주거 주변에 집중배치 되어야 한다. 키즈카페 가겠다던 아이들도 굳이 거기 가서 뛰어놀겠다고 버틸 정도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

곧 총선이다. 선거권이 없기에 아이들은 민주사회의 약자다. 선거는 그 약자들의 미래를 향한 권력투자다. 당선 즉시 파고 메우고 깔겠다는 근시안들 말고 아이들 놀기 좋은 사회를 위해 필요한 법규 제정하고 예산 배정하겠다는 이들이 선출되면 좋겠다.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