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안 들어오면 페널티” 중국업체, 한국 협력사에 ‘코로나 갑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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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HKC 디스플레이 패널 공장 전경.

HKC 디스플레이 패널 공장 전경.

“당장 중국에 직원들을 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페널티를 주겠다.”

세계 5~6위 대형 디스플레이업체 #쓰촨성 공장 증설 인원 파견 압박 #확진자 301명, 사망자도 나온 곳 #국내업체들 감염 우려 전전긍긍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확산 중인 가운데 중국의 한 대형 디스플레이 업체가 공장 증설 공사 기간을 당기기 위해 한국 협력(하청)업체들의 중국 입국을 강요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 업체가 디스플레이 생산라인을 짓고 있는 지역은 신종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하고 확진자도 많은 곳이어서 국내 업체들이 불안을 호소하고 있다.

5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중국의 대형 디스플레이 업체인 HKC는 춘절 연휴 직후인 3일부터 한국 협력사에 엔지니어 등 인력을 속히 중국으로 보내라고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의 A업체 관계자는 “HKC가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페널티까지 거론하고 있다”며 “신종 코로나 감염을 우려한 업체들이 고객사(HKC) 눈치를 보느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업체별로 한국인 직원 최소 5~6명, 중국인 현지 직원 20명 정도씩을 현장으로 보내야 할 판”이라고 토로했다.

HKC는 LCD(액정표시장치) TV 패널을 주로 만드는 곳으로, 세계시장 점유율이 5~6위권인 업체다. 지난해 말에는 중국 업체로는 처음으로 320억 위안(약 5조3500억원)을 투자해 8.6세대 대형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생산라인을 착공했다.

우한에서 멀지 않은 쓰촨성 면양.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우한에서 멀지 않은 쓰촨성 면양.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HKC는 쓰촨성 몐양시에 디스플레이 생산라인을 증설 중이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한국 업체는 한화기계·LG PRI·탑엔지니어링·KC테크·제우스·나래나노텍 등 대·중소기업 10여 곳이다. HKC에 장비를 납품한 국내 업체의 엔지니어들은 지난해 12월 초부터 몐양시에 파견돼 장비를 설치하는 셋업 업무를 진행해 왔다.

신종 코로나가 확산하면서 협력업체들은 대부분 춘절 연휴(1월 24일~2월 2일) 때 현장에서 철수했다. 한국 업체뿐 아니라 미국·일본 업체들도 본국으로 떠났다. 미국 존스홉킨스대가 제공하는 신종 코로나 환자 현황에 따르면 쓰촨성은 중국 31개 성 중에서 11번째로 확진자가 많이 발생한 지역이다. 5일 오후 7시 기준으로 301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고, 1명이 사망했다.

B업체 관계자는 “미국과 일본 협력사도 모두 철수한 상황인데 새로 반입된 장비의 셋업 일정을 앞당기기 위해  HKC가 한국 업체들에 추가 인원을 계속 요구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춘절 연휴 기간에는 한국인 30~40명이 현장에 남아 근무했다”고 전했다.

신종 코로나 확산을 우려해 중국 정부가 공장 가동 중단을 권고하는 와중에 HKC가 한국 업체의 현장 투입을 요구하는 것은 공사 기간을 맞추기 위해서다.

C업체 관계자는 “디스플레이 생산라인은 장비 반입과 셋업을 진행하는 데 보통 5~6개월이 걸린다”며 “3월 말로 예정된 시제품 출시를 위해 HKC가 다소 무리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

국내 업체들은 이런 상황을 몐양시 당국과 중국디스플레이협회 등에 알렸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까지 아무런 조치가 없다. D업체 관계자는 “중국 쪽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당국자들은 사기업에 대한 통제권이 없다는 이유 등을 대며 현장에도 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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