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파키슨병 악몽, 노모는 뇌출혈로 죽어간 딸을 지켜만 봤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달 7일 오전 11시쯤. 서울 노원구 한 아파트에 소방차와 119구급차가 도착했다. “집안에 두 사람이 사는데 이틀째 인기척이 없다”는 요양보호사의 신고가 접수됐기 때문이다. 소방대원들이 아파트 4층에 올라가 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창문을 따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10분 뒤, 대문 밖으로 40대 여성의 시신 한 구가 실려 나왔다. 뒤이어 의식이 없는 채 숨만 붙어 있는 70대 여성이 구조됐다. 이 노인은 탈수 증세를 보였으며 오랜 시간 굶어서인지 비쩍 말라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양보호사는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집에서 갑자기 숨진 중년 여성과 그 옆에서 나흘간 방치됐다가 구출된 노모 이야기다.

딸 쓰러졌지만 파킨슨병 어머니 속수무책

요양보호사가 돌보던 노모 김 모(73)씨는 딸 김 모(44)씨 죽음 앞에서 무력했다. 딸이 숨지는 순간에도 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파킨슨병과 척추 질환 등으로 거동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파킨슨병은 뇌 신경세포가 점차 파괴되면서 발생하는 신경 질환이다. 손영호 연세대 의대 신경과 교수는 “나이가 많고 발병 기간이 오래될수록 자주 넘어지고 치매 발생 가능성이 커진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재활센터 등에선 파킨슨병 환자에 대한 24시간 돌봄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어머니가 딸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작지 않다. 노원구 주민센터 관계자는 “어머니 김씨의 질환이 심각해 장애인 연금(기초연금 등 포함해 월 53만원)을 받고 있었다”며 “딸 사망 사실을 어머니가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어머니 김씨를 돌보던 요양보호사는 큰 충격을 받아 사건을 언급하기 꺼리고 있다.

전형적 파킨슨 환자의 모습. 구부정한 허리, 떨리는 손, 걷기 힘든 발이 특징이다. [중앙포토]

전형적 파킨슨 환자의 모습. 구부정한 허리, 떨리는 손, 걷기 힘든 발이 특징이다. [중앙포토]

아버지 오래전 암 사망, 오빠는 연락 뜸해

딸 김씨는 중증 질환을 앓는 어머니를 홀로 모셔야 해 더욱 힘들었다. 어머니가 파킨슨병을 앓기 전 생계를 책임지던 아버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딸 김씨는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했고 대인 기피증과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따로 사는 김씨 오빠는 고정 수입이 없는 데다 연락마저 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의지할 사람이라곤 국가 지원으로 고용한 요양보호사뿐이었다. 이 때문에 김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라는 말도 나왔지만, 수사를 맡은 서울 노원경찰서는 “극단적 선택을 의심할 외상이 없었다”며 “1차 부검 결과 딸에게 뇌출혈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딸 김씨는 생활고에 시달렸고 이를 이겨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한다. 3년 전쯤에는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전세살이를 끝내고 아파트(사고 발생 주택)를 매수했다. 기자를 통해 뒤늦게 비보를 접한 아파트 통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얼마 전에는 집 인테리어도 새롭게 한 것으로 아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두 모녀가 다닌 성당의 이웃은 사건 소식을 듣자마자 “믿기지 않는다”며 “딸 김씨는 어려운 형편에도 금요일마다 성당에 나와 급식 봉사를 한 착한 분이어서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중증질환자 집 이웃에 비상벨 설치 어떤가”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야쿠르트 배달원은 “오래전부터 간간이 마주치던 분들이었는데 어쩌면 좋냐”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일을 하며 이번 사건과 유사한 사례를 드물지 않게 봤다”고 덧붙였다. “중증 질환자 가구가 있으면 바로 주변 이웃집들에 비상벨을 설치했으면 좋겠어요.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최대한 빠르게 신고돼 구조할 수 있게 말이에요. 근본적으로는 이웃들이 서로 더욱 관심을 가져야죠. 딸이 뇌출혈로 쓰러진 뒤 하루라도 더 일찍 신고됐으면 딸도 살리고 어머니가 방치되는 일을 막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박현주·김민중 기자 park.hyunjo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