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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피플] 카마겟돈의 비극? 희대의 도주자 된 ‘닛산 영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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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카를로스 곤 

카를로스 곤

카를로스 곤

위기 극복에는 영웅이 필요하다. 영웅의 카리스마는 조직에 위기감을 불어넣고 변화를 끌어내는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다 사용가치를 다한 영웅은 때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다. ‘닛산 부활의 영웅’에서 ‘희대의 도망자’가 된 카를로스 곤(66·사진) 전 닛산자동차 회장이 그런 경우다. 하지만 과거의 영웅이 떠나간 자리에 위기는 다시 찾아온다.

비리 혐의 받다 간사이공항 탈출 #“수하물 상자 이용” 영화화 얘기도 #21년 전 닛산 구조조정 부활 성공 #르노와 통합 놓고 일본인과 갈등 #CEO 쫓겨난 뒤 순익 7분의 1로

곤 전 회장은 새해 들어 전 세계 언론에서 가장 큰 관심을 받는 기업인이다. 남다른 경영성과가 아니라 영화 같은 도주극 때문이다. NHK와 뉴욕타임스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비리 혐의로 가택 연금 상태였던 곤은 지난해 12월 29일 도쿄 자택을 탈출했다. 악기 상자에 숨어서 나갔다는 당초 외신 보도와 달리 폐쇄회로 TV(CCTV)에는 곤이 유유히 걸어서 집을 나가는 장면이 포착됐다. 이어 오사카 간사이국제공항에 있던 전용기를 타고 터키 이스탄불공항을 거쳐 레바논에 도착했다. 레바논계 브라질 태생인 곤에겐 10대 학창 시절을 보낸 레바논은 제2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곤은 대형 수하물 상자에 숨어 간사이공항 검색대를 빠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NHK는 공항 관계자를 인용해 당시 수하물 상자는 엑스레이 검사를 받지 않았다고 전했다. 곤은 오는 8일 레바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세한 탈출 경위와 이유 등을 밝힐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와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화하는 것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곤의 탈출은 단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연간 매출 11조5700억엔(약 125조원, 2018 회계연도 결산)의 닛산이란 거대기업이 21년 만에 최악의 경영위기를 맞고 있어서다. 최근 세계 자동차 시장에 먹구름이 드리우면서 ‘카마겟돈(자동차와 대혼란을 뜻하는 아마겟돈의 합성어)’이란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해 10월 세계경제전망 보고서에서 자동차 산업의 부진을 집중 점검하며 세계 경제 성장률을 떨어뜨리는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했다. 업계에선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에 따른 경기둔화, 우버 등 차량공유 서비스의 확산, 대중교통의 발전과 도시화로 차량소유 필요성 감소 등을 부진의 원인으로 꼽는다.

닛산 순이익 추이

닛산 순이익 추이

해외 주요 완성차 업체가 모두 어렵지만 그중에서도 닛산의 ‘실적 쇼크(충격)’는 두드러진다. 닛산은 오는 3월로 종료되는 2019 회계연도 결산에서 순이익이 1100억엔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곤이 닛산 최고경영자(CEO)에서 회장으로 한발 물러난 2017년(7469억엔)에 비해 6300억엔 넘게 줄어든 수치다. 지난해 말 도쿄 증시에서 닛산의 주가는 최근 5년 간 최저인 636엔까지 밀렸다.

프랑스 공영방송인 프랑스2가 공개한 카를로스 곤 전 닛산 회장(왼쪽)과 부인 캐롤. 레바논에 도착한 뒤 처음 공개된 모습. [NHK 캡처]

프랑스 공영방송인 프랑스2가 공개한 카를로스 곤 전 닛산 회장(왼쪽)과 부인 캐롤. 레바논에 도착한 뒤 처음 공개된 모습. [NHK 캡처]

2년 전 곤을 닛산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쫓아낼 때만 해도 자신만만하던 닛산의 경영진으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폴크스바겐·포드 등 경쟁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적과의 동침’까지 나섰지만 닛산은 원래 우군이었던 프랑스 르노자동차와 관계마저 꼬이게 했기 때문이다. 지분 구조만 보면 르노가 닛산의 최대주주(지분율 43.7%)지만 각 사는 1999년 합의에 따라 독립 경영을 하고 있다. 곤은 그동안 두 회사를 묶어준 끈이었다. 그는 2005년부터 12년간 두 회사에서 동시에 CEO를 맡았다.

곤은 21년 전 일본 경제계에 등장할 때 모습도 극적이었다. ‘인력 2만1000명 감축, 공장 다섯 곳 폐쇄, 부품 협력업체 수 545개 이상 축소’. 1999년 당시 45세였던 곤이 내놓은 ‘닛산 재건 3년 계획’은 일본 사회를 경악하게 했다.

“비리 경영인” “배타적 일본 문화 희생양” 엇갈리는 평가

르노가 닛산의 주식을 인수하면서 최고운영책임자(COO)로 부임한 곤에겐 자신감과 배짱이 넘쳤다. 1999 회계연도에 6844억엔(약 7조4000억원)이라는 사상 최악의 적자를 기록한 닛산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곤이 구조조정의 지휘봉을 잡은 뒤 닛산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2001 회계연도 결산에서 닛산은 영업이익 4892억엔, 순이익 3723억엔의 실적을 발표했다. 2년 만에 영업이익은 약 6배로 늘었고 순이익은 1조엔 넘게 개선됐다.

하지만 곤은 가혹한 구조조정과 장기 집권으로 일본 안에서 별로 인기가 없었다. 닛산이 르노의 지분 15%를 갖고 있지만 계약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도 닛산 경영진에겐 늘 불만이었다. 곤의 축출에 대해 겉으로는 임원보수 축소 신고 등 개인 비리가 원인이지만 일본 의 배타적인 문화로 인한 희생양이라는 시각도 있다. 곤이 르노와 닛산의 경영통합 추진에 앞장섰던 것도 일본에서 곤에 대한 반감이 커진 원인으로 꼽힌다.

닛산은 인력감축 등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대주주인 르노의 영향력을 축소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닛산은 지난해 5월 4800명의 감원 계획을 내놓은 데 이어 두 달 뒤에는 감원 규모를 1만 명까지 늘렸다. 현재 닛산의 CEO는 우치다 마코토(內田誠) 사장이다. 우치다 사장은 지난해 12월 기자회견에서 “회사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활동을 계속하고 싶다”며 르노와 경영통합에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냈다.

주정완 경제에디터 jw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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