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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자 피살 2년···지중해 섬 몰타 뒤흔든 끔찍한 '살인 사슬'

중앙일보

입력

2년 전 피살된 기자 다프네의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2년 전 피살된 기자 다프네의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2년 전 발생한 '여기자 피살 사건'이 지중해 섬나라 몰타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는 에너지 재벌이 체포되고, 총리 비서실장까지 용의선상에 오르는 등 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지자 조지프 무스카트 총리가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몰타 최대 갑부와 최고 권력이 얽힌 이 사건에 시민들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어섰다.
유럽의 아름다운 휴양지로 꼽히는 이 작은 나라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년 전 피살된 몰타의 탐사보도 기자 다프네가 자신의 블로그에 처음으로 '17 블랙'의 존재를 폭로한 글 [다프네 블로그 캡처]

2년 전 피살된 몰타의 탐사보도 기자 다프네가 자신의 블로그에 처음으로 '17 블랙'의 존재를 폭로한 글 [다프네 블로그 캡처]

'17 블랙(17 Black)'.
대체 이 미스터리한 회사의 정체는 뭘까.

지난 2017년 초. 탐사보도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프리랜서 기자 다프네 카루아나 갈리치아의 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사의 이름이 들어왔다. 정부의 부정부패를 파헤치며, 조지프 무스카트 총리의 부인이 페이퍼컴퍼니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해 조기 총선까지 끌어낸 그였다.

2월 22일. 다프네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첫 발을 쏘아 올렸다.

'17 블랙 - 두바이에 설립된 회사의 이름'이란 단순한 제목 아래 무스카트 총리, 그의 오른팔인 비서실장 케이스 스켐브리, 정치인 존 달리, 관광부 장관 콘라드 미치 등 4명의 사진을 올린 것이다. 사진 아래 '17 블랙-두바이'란 큼지막한 글씨가 박혔을 뿐 어떤 설명도 없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최고 권력가들이 정체불명의 회사와 연관돼 있단 사실을 암시하기엔 충분했다.

일단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다프네는 곧이어 충격적인 주장을 내놨다. 에너지 기업 '일렉트로가스'의 공동 소유주이자 몰타 최고 갑부인 요르겐 페네치가 두바이에 설립한 이 회사를 통해 정치인과 고위 관료들에게 뇌물을 건네고 있단 의혹이었다. '17 블랙'이 스켐브리와 미치가 세운 회사에 돈을 댔단 의혹도 제기됐다. 몰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몰타 시민들이 조지프 무스카트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연합뉴스]

몰타 시민들이 조지프 무스카트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연합뉴스]

8개월 후인 2017년 10월. 다프네는 차를 몰고 나가던 중 차량에 설치된 폭발물이 터지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당시 53세. 웬만한 영화보다 잔인한 살해 방식이었다. "몰타에서 가장 신뢰받던 언론인"(CNN)은 그렇게 세상을 떴다.
두 달 후, 빈스 무스카트 등 3명의 남성이 체포됐지만,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유족은 절규했지만 사건은 그렇게 묻히는 듯했다.

반전은 사건 발생 2년 후인 지난달 20일(현지시간) 새벽에 일어났다.
자신의 고급 요트를 타고 몰타를 벗어나려던 요르겐 페네치가 해상에서 경찰에 붙잡힌 것이다. 경찰은 그가 다프네 살해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혐의를 알리진 않았다. 시민 사회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기자 피살 사건'과 관련된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하고 있는 몰타 시민들. [AP=연합뉴스]

'기자 피살 사건'과 관련된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하고 있는 몰타 시민들. [AP=연합뉴스]

지지부진하던 수사는 어떻게 급진전될 수 있었을까.

로이터통신은 "처음 용의자로 잡혔던 빈스 무스카트가 지난해 4월 감형을 목적으로 자세한 상황을 자백하며 수사가 진전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마피아에게서 폭탄을 구입했다" "처음에는 총기로 살해할 계획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한 택시운전사가 '중간책'으로 지목됐다.

이 중간책은 지난달 14일 체포됐고, 그가 페네치를 체포할 수 있는 증거를 제공하며 수사가 급물살을 탔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새벽에 도망치다 해상에서 체포된 페네치는 더 충격적인 '폭탄 고백'을 했다. 비서실장 스켐브리가 살해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스켐브리 비서실장은 곧 사임을 발표했고, 그날 전격 체포됐다. 이어 콘라드 미치 관광부 장관이 사퇴하고, 크리스티안 카르도나 경제부 장관도 업무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내년 1월 사퇴 의사를 밝힌 몰타의 조지프 무스카트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내년 1월 사퇴 의사를 밝힌 몰타의 조지프 무스카트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몰타의 최대 갑부와 최고 권력이 여기자 피살 사건과 관련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들이 들고 일어섰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가 2주 넘게 이어졌다.

2년 전 미스터리로 남았던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고,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결국 총리가 결단을 내렸다. 무스카트 총리는 1일 TV 연설을 통해 내년 1월 12일 후임이 결정되면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피살된 기자와 연관이 있단 의혹은 강하게 부인했다.

앞으로 수사가 어떻게 진행되든 몰타가 혼란에서 벗어나긴 힘들 것이란 게 주요 외신들의 추측이다. CNN은 "유럽의회 대표단이 몰타에 급파돼 고위 관료들의 부패 의혹 등을 조사할 예정"이라며 "몰타의 혼란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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