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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전날에도 은지와 놀아준 딸, 가슴이 짠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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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배은희의 색다른 동거(12)

수능 전날 저녁, 은지랑 카드 게임을 하고, 저녁 설거지 하는 어진이. [사진 배은희]

수능 전날 저녁, 은지랑 카드 게임을 하고, 저녁 설거지 하는 어진이. [사진 배은희]

수능이 끝났다. 둘째 어진이의 외로운 수능이 끝났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교 밖으로 나와서, 혼자 공부하던 아이. EBS를 보면서 밤늦게까지 독서실을 지키던 아이다. 위탁 동생 은지가 생기면서 언니 역할까지 했던 어진이가 지난 14일 수능을 끝냈다.

은지는 수능 전날에도 어진이 방문을 두드리며 졸랐다. “언니, 나랑 ‘우노’하자” “은지야, 잠깐만. 언니 가방 챙기고. 중요한 거야.”

은지는 조금 기다리는가 싶더니 또 재촉했다. 결국 어진이는 은지랑 마주앉아 카드 게임을 했다. 요즘 카드게임에 푹 빠진 은지다. 승부욕도 대단해 꼭 이겨야 하고, 게임에서 지면 울거나 한참 시무룩해 한다.

시험 전날이라 나도 신경이 좀 쓰였다. 어진이가 조금 편하게 있다가 푹 자야 일찍 일어날 테고, 컨디션도 좋을 테니까. 그런데 어진이는 은지랑 카드 게임을 해주고, 저녁을 먹고 설거지까지 했다. “어진아, 그냥 둬. 엄마가 할게.”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할 것도 없는데요, 뭐.”

달그락 거리며 설거지하는 모습을 쳐다보는데, 기특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언제 저렇게 커서 은지를 돌봐주고, 설거지를 하는 걸까? 그 작고 여린 아기가 벌써 수능을 보고, 성인이 된다니.

수능 전날 어진이가 독서실에 잠깐 갔다온다는 말에 은지가 먼저 일어났다. 어진이를 유난히 따르는 은지. 요즘은 과자 때문에 서로 다투기도 하는 현실 자매다. [사진 배은희]

수능 전날 어진이가 독서실에 잠깐 갔다온다는 말에 은지가 먼저 일어났다. 어진이를 유난히 따르는 은지. 요즘은 과자 때문에 서로 다투기도 하는 현실 자매다. [사진 배은희]

어진이가 잠깐 독서실에 갔다 온다고 해서 은지랑 같이 나섰다. 은지는 얼른 어진이 손을 붙잡았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위탁가족으로 산다는 것이 남들 눈엔 특별해 보이겠지만, 우리의 일상은 이렇게 평범하고 밋밋하다.

“은지야, 내일 언니 시험 봐. 은지 잠잘 때 나갈 거야. 갔다 와서 많이 놀아 줄 게!” 밤에 은지 옆에 누워서 어진이가 말했다. 볼록한 뺨을 비비고, 뽀뽀를 하고, 은지를 토닥여줬다. 은지를 재우려고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고 은지 머리칼을 쓸어 주며 그 옆을 지켰다.

제 몫을 먼저 챙기기 보다는 주위를 더 신경 쓰는 어진이다. 그래서 더 짠한 마음이 드는 걸까? 수능 전날도 자기 컨디션을 먼저 챙기기 보다는 은지랑 놀아주고, 나를 도와주려는 모습이 자꾸만 예전의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다.

수능 날 아침엔 일찍 일어나서 덤덤하게 준비했다. 보온 도시락엔 따끈한 찰밥이랑 고기, 된장국을 넣었다. 너무 특별한 말은 부담이 될 것 같아서 “파이팅!”하고 웃었더니, 어진이도 입꼬리를 활짝 올리며 따라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이.

아이가 시험을 치는 동안, 나는 학교에 출근해서 일을 했다. 중간 중간 시계를 계속 쳐다보면서 ‘지금은 영어 시간이네’ ‘지금은 쉬는 시간이네’ 하며 시험장에 앉아 있을 어진이를 그렸다. 내가 뭔가를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오롯이 혼자 이겨내야 하는 싸움이었다.

어진이의 수능을 응원하며 미술학원 원장님이 선물해주신 아이스크림 케이크 받고 인증샷. 상품권, 용돈, 초콜릿까지 넘치는 선물을 받고 감동한 어진이. [사진 배은희]

어진이의 수능을 응원하며 미술학원 원장님이 선물해주신 아이스크림 케이크 받고 인증샷. 상품권, 용돈, 초콜릿까지 넘치는 선물을 받고 감동한 어진이. [사진 배은희]

집에 온 어진이는 은지부터 불렀다. “은지야!” “언니! 우리 ‘우노’하자!” 어진이는 가방을 휙 던져 놓고 은지랑 거실에 앉아 카드 게임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를 보고 한 마디 툭 던졌다. “엄마, 생각보다 저를 응원해 주는 분이 많았어요. 정말 감사했어요.” 여기저기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초콜릿, 아이스크림케이크, 용돈으로 격려한분도 있었다. 혼자 공부하느라 독서실에 앉아 긴긴 시간을 보낸 어진이는 그렇게 많은  응원이 낯설면서도 고마웠던 모양이다.

이제 곧 고3 친구들의 진학 소식이 들리겠지. 누구는 어느 대학에 합격했다, 누구는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하면서…. 그 소식에 흔들리지 말길. 어차피 인생은 대학 입학으로 끝나는 게 아니니까. 변화무쌍한 제주의 날씨 같은 것이니까.

우린 둘이 앉아 제주에 살면서 제주대에 다니는 게 얼마나 이점이 많은지 누릴 수 있는 혜택은 무엇인지 꼽아가며 수다를 떨었다. 국립대의 장점, 장학 제도, 집에서 통학할 수 있다는 것…. 어진이는 제주대 사회학과에 수시 원서를 넣은 상태다. 위탁가족의 경험을 살려 아동이나 청소년 대상의 사회복지 관련 일을 해보고 싶단다. 진로를 결정하는데도 은지의 영향이 컸다.

은지는 평소에도 어진이를 졸졸 따라다닌다. 처음엔 귀찮아하던 어진이도 이젠 은지 옆이 익숙해졌단다. 같이 사니까 점점 닮아간다. [사진 배은희]

은지는 평소에도 어진이를 졸졸 따라다닌다. 처음엔 귀찮아하던 어진이도 이젠 은지 옆이 익숙해졌단다. 같이 사니까 점점 닮아간다. [사진 배은희]

어진이와 마주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하다보니 20대의 내 모습이 자꾸만 보였다. 가방 하나 싸들고 지적장애시설에 들어갔던 그 무모한 용기. 역시 가장 강력한 공부는 ‘삶’이다. 어진이는 ‘은지 언니’가 되면서 많은 걸 체득하고 있다.

“엄마, 나중에 입양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위탁도 좋고요.” 그래, 조금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겨자씨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도 멋진 인생이지. 어진이는 위탁가족의 장·단점을 이미 알고 있고,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야 하는지도 아니까. 누구보다 잘 할 거라 믿는다.

어진아! 이젠 정말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그것에 매진하길. 아프고, 흔들려도, 인생은 그렇게 전진하는 것이란 걸 알았으면 좋겠다. 어진이의 보석 같은 인생을 축복하며. 모든 수험생에게 박수를 보낸다.

위탁부모·시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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