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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붉은선비'-신화에서 발견한 대중성, '신과 함께' 이을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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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2호 면

국립국악원이 ‘2019 대표공연’으로 내세우며 야심차게 준비한 국악판타지 ‘붉은선비’(11월 19~23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의 막이 올랐다. 매년 하반기 국악 현대화와 대중화를 모토로 타 장르 유명 연출가를 섭외해 극형식을 이용한 대규모 작품을 제작해온 국립국악원이 2년여 공들여 준비한 무대라고 한다.

[유주현 기자의 컬처 FATAL] #11월 19~23일까지 국립국악원 예악당

국악판타지 '붉은선비' [사진 국립국악원]

국악판타지 '붉은선비' [사진 국립국악원]

2년 전 영화 ‘만추’의 김태용 감독과 협업해 뉴욕 링컨센터 등 해외투어까지 나섰던 ‘꼭두’가 스크린과 국악의 성공적 만남을 이뤄낸 케이스라면, 올해 ‘붉은선비’는 뮤지컬과 국악의 만남을 시도했다. 뮤지컬 ‘풍월주’ ‘김종욱 찾기’ ‘청 이야기’ 등에 참여했던 이종석 연출과 영화 ‘올드보이’‘친절한 금자씨’의 음악감독 이지수,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인면조로 깊은 인상을 남긴 임충일 미술감독 등이 제작에 참여했다.

함경도 지방에서 망자의 넋을 기리는 ‘망묵굿’에서 구술되는 ‘붉은선비와 영산각시’라는 고대신화를 각색한 현대극이다. 학생들을 이끌고 현장학습 나온 고등학교 생물교사 지홍이 갑작스런 산불을 만나 생사의 기로에 놓이고, 그의 아내 영산이 남편을 찾아 저승세계로 따라나서는 이야기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으로 귀환하기 위한 여정에 각종 관문을 통과하는 전개와 현생과 전생을 넘나드는 플롯이 언뜻 ‘신과 함께’를 연상시킨다. 그만큼 대중성을 염두에 둔 선택인 것이다.

국악판타지 '붉은선비' [사진 국립국악원]

국악판타지 '붉은선비' [사진 국립국악원]

이 공연의 목적이 ‘전통의 현대화’라면 일단 서사의 현대화에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하늘나라 사람이었던 남녀의 러브스토리를 통해 산천초목과 만물이 생겨나게 된 근원과 함께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원작 신화를 현대사회의 환경 문제로 풀어낸 것이다. 신화 속 업보로 인해 사랑을 이루지 못한 부부가 수백년 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현세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으나 또다시 비극적 운명에 놓이는 사연 속에 인간과 자연의 근원적 대립부터 세월호 참사를 연상시키는 정치사회적 부조리 문제까지 담아내고 있다.

국악판타지 '붉은선비' [사진 국립국악원]

국악판타지 '붉은선비' [사진 국립국악원]

하지만 음악적으로나 시각적인 면에서 전통 특유의 아름다움을 현대화하는데 성공한 공연이라고는 보기는 어렵다. ‘꼭두’에서 스크린과 무대의 기적같은 만남이 새로운 미학을 만들어내며 자연스런 감동을 낳았다면, ‘붉은선비’는 국악인들이 젖먹던 힘까지 쏟아내 억지로 화려한 뮤지컬을 만든 느낌이랄까.

정가와 경기민요 소리꾼이 각각 주인공 부부 ‘지홍’과 ‘영산’역을 맡았지만, 두 사람은 정가도 경기민요도 부르지 않았다. 뮤지컬 넘버 풍으로 작곡된 각자의 테마곡을 딱 한 곡씩 불렀을 뿐 대부분 어설픈 연기로 점철됐다. 자기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기량을 가진 예술가들이건만, 본업의 전문성과 예술성을 조금도 드러내지 못하고 연기와 뮤지컬 넘버의 아마추어리즘에 머물러야 했다. ‘무당’과 ‘물과 불의 소리’역을 맡은 소리꾼들이 화초타령, 산천굿 등을 삽입곡으로 부르긴 했지만 어딘지 겉돌아 보였다.

국악판타지 '붉은선비' [사진 국립국악원]

국악판타지 '붉은선비' [사진 국립국악원]

무대 구성은 시쳇말로 ‘투머치’였다. ‘지홍’과 ‘영산’을 각각 1역 2인으로 설정하고, 한 사람의 ‘얼’과 ‘넋’을 구분해 이승의 ‘얼’을 소리꾼이, 저승의 ‘넋’을 무용수가 담당하는 구조에 그다지 설득력은 없어 보였다. 후반부에 감춰졌던 전생의 연을 표현하는 2인무가 꽤 아름다웠지만 ‘넋’들의 존재감은 거기까지였다. ‘국립국악원의 본질인 국악을 중심에 두겠다’는 취지로 연주단을 무대 위 정면에 배치해 시야를 꽉 채웠지만, 첼로, 신디, 더블베이스, 호른 등으로 구성된 객원 양악기들의 음향이 국악기를 압도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국악판타지 '붉은선비' [사진 국립국악원]

국악판타지 '붉은선비' [사진 국립국악원]

극장 벽면까지 투사되는 영상과 드라이아이스까지 빈번히 사용한 무대효과도 한국적인 멋을 살린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렇다고 지금처럼 공연예술이 발전한 시대에 세련된 무대언어로 보이지도 않았다. 임충일 미술감독의 동물 탈만이 ‘평창 인면조’의 미학을 살려내는 정도였다.

국악판타지 '붉은선비' [사진 국립국악원]

국악판타지 '붉은선비' [사진 국립국악원]

‘2019 국립국악원 대표공연’이라는 ‘붉은선비’는 국악이 현대의 대중에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시도 중의 하나로 가치를 평가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립국악원이 가진 국악 현대화에 대한 철학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표공연’이라면 대중화, 현대화라는 커다란 구호 아래 어떤 디테일한 방향성을 가질 것인지, 누구를 타겟으로 할 것인지 철학부터 세워야 하지 않을까. 국립국악원이 스스로에게 질문할 때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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