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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로 남은 안중근 의사 발자취-본사 한천수 특파원 중국 하얼빈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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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우리 독립 운동사의 큰 별 안중근 의사의 숨결이 남아있는 중국 하얼빈. 올해는 안 의사의 장거가 있은지 80주년이 되는 해.
지난달 29일부터 4일까지 중국 하얼빈에서 열린 세계보건기구(WHO)기초보건발전을 위한 미디어 세미나에 참석했던 사회부 한천수 기자가 하얼빈 시내 안 의사의 자취와 한인동포들의 생활상을 사진과 함께 취재했다.
『안중근 선생요? 잘 압니다. 세계적인 영웅이죠』
세계보건기구 세미나 안내를 맡고 있던 40대의 하얼빈 여자는 안중근 의사 이야기가 나오자 반색을 하며 『어떻게 그 이름을 아느냐』는 듯 되물었다.
이 안내원의 설명으로는 하얼빈 사람들은 안 의사의 쾌거를 잘 기억하며, 그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중근 의사-. 지금부터 꼭 80년전인 1909년 10월 26일 하얼비 역 「플랫폼」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대한 남아의 기개를 세계에 떨쳤던 우리독립운동사의 큰 별.

<인구 3백80여만명>
안 의사의 자취가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에 왔다는 들뜬 기분으로 하얼빈에 도착한 것은8월28일 낮. 중국 민항편으로 2시간여만에 도착한 하얼빈 공항은 한가한 시골 공항의 모습이었다.
흑룡강성의 성도인 하얼빈은 중국 동북지방 최대의 농업과 기술·공업도시로 인구는 약3백80만명. 1월의 평균기온이 영하 19·4도, 최저 기온이 영하 38·1도까지 내려가는 하얼빈은 「겨울의 도시」로도 불린다.
하얼빈은 「동방의 모스크바」「서방의 파리」로 불릴 정도로 동서의 문물이 교차하는. 도시로 도심 곳곳에 러시아·프랑스·이슬람 건물이 즐비해 이색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WHO의 세미나는 흑룡강성이 직영하는 화원촌 호텔에서 열렸고 참석자들의 숙소도 이곳에 마련됐다.
서태평양 지역 10개국의 언론 종사자와 보건교육 관계자 등 20명이 참석한 세미나는 빠듯한 일정으로 강행군하는 바람에 개인 취재시간을 좀처럼 얻기가 어려웠다.
9월2일 토요일 모처럼 오후 시간을 얻어 하얼빈 시내「답사」에 나섰다. 하얼빈에서 태어난 토박이 한인동포 최용학씨(60·전직의사)와 이수한씨(57·공무원)가 동행했다.
먼저 달려간 곳은 하얼빈 역. 1877년 러시아에 의해 건축된 하얼빈 역은 1905년 개축된 뒤 1960년대에 모두 뜯겨 안 의사 거사 당시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역사 중앙의 시계탑 건물을 중심으로 양쪽의 건물은 60년대에 완공됐으나 현재 다시 개축중이고, 중앙의 시계탑 건물도 지난해부터 건축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넓은 역 광장도 건축자재가 어지럽게 쌓여 있어 통행하기도 불편할 정도.
개찰구 직원의 양해를 얻어 플랫폼으로 나가니 기차를 타려는 승객들의 바쁜 발걸음만 어지러웠다.
중국 어느 도시를 막론하고 기차를 타는 것은 우리나라의 귀성열차 이상으로 복잡하고 동북지방 교통의 중심지인 하얼빈에서도 승차전쟁은 치열하다는 것이었다.
역사 중앙건물 앞 1번 플랫폼이 바로 환영객들 틈에 숨어있던 안 의사의 권총에서 불이 뿜어 나왔던 곳, 이등박문이 쓰러진 지점이었다.

<시내버스들 초만원>
안 의사의 총성이 들리는 듯하고 기자 자신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기 어려운 그 역사의 현장.
그러나 그 자리엔 파헤쳐진 보도블록 위로 먼지만 일고 짐 보따리를 젊어진 중국인 승객들의 무심한 발걸음이 오가고 있었다.
플랫폼에서 1백50m쯤 떨어진 지점, 안 의사가 거사를 앞두고 정탐을 위해 거닐었다는 구름다리는 그대로 남아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 의사의 쾌거는 당시 한국인들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같은 반식민지 상태에 있던 중국인들에게는 대륙 침략의 원흉을 중국인이 아닌 조선청년이 처단했다는데 대해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놋쇠 표지판 없어져>
중국인들은 안 의사의 장거를 기리기 위해 플랫폼 저격 현장에 놋쇠로 된 표지판을 박아놓았으나 그 동안 몇 차례의 개수작업을 하며 이것마저 없어져 버렸다고 전해진다.
하얼빈 역 광장 앞 도로를 따라 50여m 떨어진 「하얼빈 철로 공안국」은 안 의사가 저격 후 곧바로 붙잡혀 첫 재판을 받던 곳으로 옛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안 의사는 당시 만청 경찰에서·조사를 받고 개판가지 받았으나 다시 일제에 넘겨져 여순으로 옮겨졌었다.
하얼빈 중심가에 위치한 조선민족 호텔 길 맞은편에는 안 의사가 거사 전날 우덕정·유동
하등 동지들과 함께 묵으며 계획을 숙의했던 집터가 있었다.
3층 짜리 이 건물은 몇년전 개축을 한 모습이며 현재는 옛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이밖에 안 의사의 행적이 전설처럼 남아있기도 했으나 확인은 어려웠다.
즉 안 의사가 거사를 앞두고 경찰에 좇기다 여자 혼자 집을 지키는 가정집으로 피신, 이 여자가 자신의 남편이라고 속여 위기를 넘기고 이 여자로부터 일본 의복을 빌려 입고 나가 거사에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하얼빈에서 안 의사의 자취를 더듬은 결과는 아쉬움 바로 그것이었다. 역사의 흔적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안 의사의 장거를 기리기 위한 어떤 기념물이라도 남겨야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간헐적으로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구체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동행한 최씨는 『남·북한간의 미묘한 관계 때문에 하얼빈내의 안 의사 기념사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역사의 현장이 민족의 숨결 속으로 되돌아오는 그날이 빨리 오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북위 45도 45분에 위치한 하얼빈엔 가을이 빨리 왔다. 9월 초순인데도 벌써 거리엔 반팔 옷차림이 자취를 감추고 바바리코트를 비롯한 가을 옷차림 일색이다. 근교 들판엔 수수가 고개를 숙이고 벼이삭도 누런빛을 띠며 추수철이 임박했음을 알린다.
하얼빈의 아침도 중국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직장과 학교로 향하는 자전거의 행렬로 시작된다. 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양장으로 멋을 낸 숙녀도,
미니스커트 차림의 아가씨도 자전거를 타고 자연스럽게 달린다.
시내버스 두 대를 연결해 전기로 달리는 공용차(트롤리버스)는 항상 콩나물 시루처럼 만원이다.
인구 3백80여만명의 하얼빈엔 한족이외에 29개 소수민족이 생활하고 있다. 한인 동포는 4만4천여 명으로 만족·회족 다음의 세 번째로 많은 소수민족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역사·정신강조>
하얼빈의 한인동포는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압제와 가난을 벗어나려고 이주한 경상도 출신이 주류를 이루는 점이 특이하다.
WHO의 지원으로 기초보건 시범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하얼빈에서 3시간 거리의 흑룡강성 수화현흥화향의 경우 인구4천1백여명 가운데 97%가 한인동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대부분이 경상도 출신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면 단위에 해당하는 흥화향에서는 모든 의사소통이 우리말로 이뤄지고 소학교(국민학교)와 중학(중·고교과정)에서도 우리말 수업에 중국어는 외국어로 가르칠 정도.
마침 세미나에 참석한 한국인들이 현장 답사차 흥화향을 방문한 8월30일 이곳, 동포들은 처음으로 맞는 모국의 손님들을 환영하기 위해 들뜬 모습이었다.
흥화소학교를 찾았을 때는 꽃 수술을 든 학생들이 교문까지도 열해 손님들을 맞았고 강당에서 벌어진 즉석 환영파티에선 밴드가 『신사동 그 사람』을 연주해 방문객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흥화소학교는 각 학년에 2학급씩 4백명이 재학하고 있었는데 「민족교육을 진흥시키자」는 표어를 내걸고 우리의 언어·역사·민족정신을 학생들에게 강조하고 있다고 했다.
벼농사가 주업인 흥화향은 다른 지역에 비해 문화수준이 높은 편이라고 했으나 우리나라의 농촌에 비해 생활수준은 크게 낙후된 것으로 보였다.
83년부터 시작된 토지분배 정책에 따라 주민들은 각자의 땅에 농사를 지은 뒤 30%는 「임무완성하고」(국가에 바치고), 70%는 각자 시장에 처분하게돼 생활이 나아지고 있다고 했다.
월급 1백원(우리 돈 약2만원)을 받는다는 흥화향 공산당 서기 정복술씨(44)는 『최근에 한국친척을 방문한 동생의 말을 들으면 이곳에서 잘 사는 집이 한국 농촌과 비슷한 형편』이라고 말했다.
한인 집단거주지역인 흥화향과는 달리 하얼빈 시내의 한인 동포들은 각시에 흩어져 살고있다.

<모국방문 평생소원>
소수민족 정책에 따라 세워진 학교·교회·백화점·신문·극장 등에서 우리말이 통용되고 있으나 동포들 사이의 끈끈한 연대의식은 희박한 것으로 보였다.
하얼빈 시내에는 15개 한인 국민학교와 3개 중학이 있으나 국민학교에서만 우리말을 상용하고 중학에 진학하면 제 1중만을 제외하고는 중국어 수업이 이뤄지고 있다.
조선족 제 2중 박경행 교장(55)은 『학생들의 우리말이 점점 서툴어지고 대학에 진학하면 어차피 중국어를 써야하므로 중국어 수업을 한다』고 말했다.
하얼빈 시내에는 유일하게 기독교회가 한곳 있는데 우리동포들은 이곳을 빌러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우리말로 예배를 본다.
아직 한인목사가 없어 심양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온 이미란씨(27·여)가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데 교인들은 1백50석 정도의 교회당을 가득 메운다.
이곳 교인들은 하루빨리 한인교회가 생겨 동포들끼리 마음놓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가장 큰 소원.
우리말로 발행되는 흑룡강 신문은 흑룡강성과 공산당 기관지. 중국 동북지방의 한인 동포들에 관한 뉴스를 주로 다루는 흑룡강 신문은 4만여부가 발행되며 1년 구독료는 40원(우리 돈으로 8천원 정도)이라고 했다.
동포들의 문화중심지로 2년전 설립된 조선문화 궁전엔 공연장과 비디오 상영실·당구장이 들어서 있는데 영화상영을 위주로 했다. 얼마전에는 이곳에서 안중근 의사에 관한 북한제작 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다고 전한다.
하얼빈 한인들의 언어습관도 상당히 변한 듯했다. 두음법칙을 쓰지 않는 북한식 언어가 그대로 통용되고, 「양백」(2백) 「일없다」(괜찮다) 「료해한다」(이해한다) 등 생소한 말도 많았다.
무엇보다 동포 2세, 3세로 내려가며 우리말이 많이 잊혀져 가는 현실에 대해 나이든 사람들은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하얼빈의 동포들을 만나면 누구를 막론하고 모국 방문이 화제에 오른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농업이나 공장 생활로 형편이 어려운 우리 동포들은 그만큼 발전된 고국에 대한 동경이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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