앱에서 펑 ‘현대판 지니’ 밥은 먹었는데 설거지는 하기 싫고, 꽉 찬 쓰레기를 버리러 가기 귀찮을 때가 누구나 한번쯤 있었을 것이다. 이럴 때 램프를 문지르면 ‘짠~’하고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는 영화 ‘알라딘’에만 있는 걸까. 그런 상상 속 지니가 현실 세계에 왔다(?). 스마트폰 앱을 클릭하면 주인을 도울 ‘현대판 지니’가 달려온다. 귀찮은 잡일은 물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때 등장해 주인 대신 일을 뚝딱 처리해 준다. ‘귀차니스트’를 위한 시장경제, 이른바 ‘귀차니즘 이코노미’가 일상 속 새로운 트렌드로 떠올랐다.
잔일부터 짐 운반까지 척척 대행 #1인 가구, 맞벌이 부모 증가 따라 #온·오프라인 연계 인력 중개 인기
온라인에서 호출해 오프라인에서 도움을 받는 온·오프라인 연계(O2O) 방식의 인력 중개 플랫폼이 최근 국내외에서 떠오르고 있다. 스마트폰 앱 기반의 인력 중개 플랫폼은 미국 ‘태스크 래빗’, 호주 ‘에어 태스커’, 일본 ‘애니타임즈’ 등이 있다. 국내에선 2016년부터 최근 3년 동안 ‘애니맨’을 비롯해 ‘도와줘’ ‘김집사’ ‘짬짬이서울’ 등의 앱들이 나왔다.
이 앱들은 의뢰인이 온라인을 통해 도움을 요청하면 그 임무를 수행하고 싶은 사람이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서로의 희망 견적(인건비)이 맞으면 거래가 성사된다. 보통 시간당 1만원 안팎이거나 건당 몇 만원씩이다. 일감을 중개해 준 플랫폼 업체는 10% 내외의 수수료를 가져간다.
업계 추산 데이터에 따르면 이 같은 인력 중개 플랫폼 시장은 하루 평균 의뢰 건수가 22만 건에 이르고 건당 평균 비용 1만5000원(수수료 3000원 포함)을 지불하는 등 올해 견적 비용 기준 1조2000억원 규모로 성장했다.
고객은 여성, 헬퍼는 남성 많아
원하는 건 무엇이든 의뢰할 수 있는 만큼 의뢰 유형은 각양각색이다. ‘카페에 가서 아메리카노 3잔을 사다 달라’ ‘여성 구두를 빌려 달라’ ‘벌레를 대신 잡아달라’ ‘남자친구가 아픈데 약국에서 감기약을 사다 달라’ 등 각종 심부름이다. 혼자 사는 여성의 경우 힘을 써야 하는 가구 조립, 무거운 짐 나르기, 원룸 이사, 전구 교체 관련 의뢰도 많다. 특히 ‘녹색 어머니’ 대행은 워킹맘에게 인기다.
때론 임무 수행자는 유명 브랜드의 굿즈 신상품을 사기 위해 의뢰인 대신 줄을 서주기도 하고 의뢰인이 아플 때 병원 진료에 동행해 준다. 한 예로 미국 유명 버거인 쉐이크쉑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2016년 당시 버거를 사려면 2시간 이상 줄을 서야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구매 대행 의뢰가 몰렸고 인건비는 1시간당 1만원 이상을 웃돌았다고 한다.
반려동물을 전문적으로 관리해 주는 플랫폼도 생겼다. 펫시터를 연결해 주는 플랫폼 기업 도그메이트의 경우 지난달 반려견 돌보미 서비스 이용률이 전달보다 20% 증가했다. 김예지 도그메이트 마케팅팀장은 “30대 여성이 주고객”이라며 “의뢰인을 방문해 애완견 훈련·목욕·미용을 대행하거나, 아프거나 나이 든 개만 전문적으로 돌봐주는 등 내년에 맞춤형 서비스로 세분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애니맨의 경우 의뢰인 가입자는 총 24만 명으로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 여성이 가장 많다. 지난달 말까지 누적 의뢰 건수는 총 18만 건. 이민규 애니맨 기획팀장은 “헬퍼(애니맨의 임무 수행자) 가입자는 20대 남성이 가장 많지만 의뢰인이 많이 찾는 헬퍼는 생활 노하우가 쌓인 30~50대 남성이 주를 이룬다”고 말했다.
이준영 상명대 소비자분석연구소장은 이 같은 앱 기반 인력 중개 플랫폼 서비스가 내년 ‘편리미엄’ 트렌드를 이끌 것이라고 설명한다. 편리미엄이란 편리함과 프리미엄을 결합한 신조어로 가격·품질 못지않게 편리함을 중시하는 소비 성향을 의미한다.
이 소장은 “현대인은 ‘편리함’을 프리미엄 서비스로 누리는 데 기꺼이 지갑을 연다”며 “소비자는 자신의 수요를 바로 바로 해결하고 싶어 해 앱 기반의 공유 플랫폼을 선호한다”고 분석했다. 현재는 단순 심부름, 단기 알바 수준의 의뢰가 많지만 향후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직종으로까지 확대될 것이란 전망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인력 중개 플랫폼이 해결해야 할 숙제도 남아 있다. 누구나 지원할 수 있는 임무 수행자의 신원을 플랫폼 업체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형의 실효 등에 관한 법률’ 제6조에 따라 사기업이 개인의 신원을 조회할 수 없다.
철저한 신원 확인이 최대 과제
애니맨의 경우 ‘헬퍼’ 지원자는 20만 명이 넘는다. 인적사항을 등록한 뒤 본인의 신분증과 실물 사진을 비교 대조해 동일 인물이라고 판단된 경우에 한해 업체가 정식 헬퍼로 인정해 주는데 그 숫자는 4만여 명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사진·신분증을 도용한 경우엔 걸러낼 방법이 없다. 이 때문에 의뢰인이 범죄에 노출될 위험성도 도사린다.
실례로 지난해 6월 인력 중개 플랫폼을 통해 가구 옮기기를 의뢰한 여성에게 범죄 전과자가 매칭돼 의뢰인의 집 안에서 성폭행을 시도했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소장은 “기존 시장경제나 비즈니스 형태와 다른 신종 서비스가 빠른 속도로 나오는 데 반해 법·제도·정책은 트렌드 변화 속도에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다”며 “자칫 위험한 사각지대에 놓일 수 있는 소비자의 안전을 지키려면 정부·국회·공공기관이 세심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애니맨은 내년부터 본인 인증 앱 ‘패스’를 통해 인증 신뢰도를 높일 계획이다. 이 팀장은 “범죄자 중 신상이 공개된 성폭행범에 한해 공식적으로 비교 대조에 활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중”이라며 “그래도 임무 수행자 자격 요건에 최소한 전과자는 가입을 불허할 수 있도록 법이 개선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현장에선 의뢰인이 무리한 요구를 추가하거나 임무 수행 중 의뢰인의 물건이 파손되는 등 변수가 생기기도 한다. 임무 수행자가 불친절해 불편했다는 댓글도 적지 않다. 의뢰인이나 임무 수행 지원자는 배상 관련 보험 가입 여부를 확인하고 의뢰 내용과 다른 요구를 하거나, 임무를 불가피하게 수행하지 못할 경우 등 여러 변수에 대해 플랫폼 업체가 정한 내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할대행 의뢰도 자주 올라온다. 가령 부모님을 뵈러 갈 때 애인 역할을 대행해 주고 편부모 자녀의 학교 운동회 때 부모 역할을 연기하는 경우다. 하지만 ‘하얀 거짓말’ 차원을 넘어 사칭을 빙자해 상대방에게 금전적·정신적 피해를 줄 경우 중대 범죄에 해당할 수 있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정심교 기자 simky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