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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폭격'시키고 눈 찌르고…수사기관 '악몽의 고문사'

중앙일보

입력

“형사가 너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라고…”

1980년대 8차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여년 간 옥살이를 한 윤모(53)씨는 지난달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경찰의 가혹행위를 주장했다. 그는 “저녁에 밥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경찰이 영장도 없이 잡아가더니 인근 야산으로 봉고차를 타고 데려갔다. 이후 3일 동안 잠도 안 재우고 마구 구타하는 악몽이 시작됐다”고 회상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들이 용의자를 조사하는 모습. [중앙포토]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들이 용의자를 조사하는 모습. [중앙포토]

당시 수사팀은 “윤씨가 자백을 해 고문을 할 필요가 없었다”며 고문사실을 부인했다. 반대로 ‘자백을 하지 않는다면 고문을 해도 된다는 것이냐’는 비판이 나왔다. 군사정권을 막 내리게 한 민주화 이후에도 실제로 불법 고문이 비일비재했을까.

군사정권 막 내린 후에도 ‘가혹행위→사망’ 넘쳐나

화성 사건 수사가 얼마나 부실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1993년 윤씨처럼 용의자로 체포됐다 풀려난 뒤 자살한 김모씨 얘기다. 한 심령술사가 “꿈속에서 범인을 봤다”며 김씨를 지목해 경찰이 체포했고, 가혹행위 끝에 자백을 받았다. 이후 검찰에서 그를 증거부족으로 석방했지만 김씨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경찰의 가혹행위가 뒤늦게 인정돼 재심에서 무죄를 인정받은 판례도 있다. 전북 익산 약촌오거리에서 택시운전수가 강도를 당해 숨진 ‘약촌오거리 살인사건(2000년)’이다. 당시 오토바이를 타고 현장을 지나가던 16살 최모군이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렸다. 경찰의 의해 모텔방에 끌려가 구타를 당한 최군은 결국 ‘칼로 택시기사를 찔렀다’는 조서에 사인을 했다.

전북 완주군 삼례읍의 나라슈퍼에 3인조 강도가 침입해 할머니를 숨지게 한 ‘삼례 나라슈퍼 사건(1999)’도 있다. 인근에 살고 있던 19~20살의 청년 세 명이 범인으로 지목돼 자백을 했다. 당시 유족이 촬영한 현장검증 동영상에 경찰관이 욕설과 폭행을 하며 짜맞추기를 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겼다. 윤씨의 변호를 맡는 박준영 변호사가 두 사건 모두 무죄 판결을 이끌었다.

2002년 검찰 발칵 뒤집은 ‘물고문’ 사망 사건

검찰도 예외는 아니다. 2002년 10월 26일에 일어난 ‘서울지검 피의자 사망 사건’은 당시 검찰을 발칵 뒤집어놨다.

2002년 서울지검의 피의자 사망 사건을 보도한 방송뉴스. [KBS뉴스 캡처]

2002년 서울지검의 피의자 사망 사건을 보도한 방송뉴스. [KBS뉴스 캡처]

이날 서울 서초동 서울지검 1206호 강력부 홍모 검사 사무실에서 살인 혐의로 조사를 받던 피의자 조모씨가 갑자기 쓰러진 뒤 깨어나지 않았다. 전날 오후 9시부터 아침까지 10시간 가량 밤샘 조사를 받은 뒤였다. 검찰은 “조씨를 잠깐 재우고 낮 12시쯤 점심을 먹기 위해 깨웠더니 의자에 앉았다가 옆으로 쓰러졌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조사 과정에서 폭행은 없었다”고 했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조사 결과는 달랐다. 외부충격에 의한 뇌출혈이나 쇼크사가 사망 원인으로 나왔다. 인권위원회 조사결과 수사관들은 얼굴에 수건을 덮고 물고문을 하거나 뒷짐을 지고 머리를 땅에 박는 이른바 ‘원산폭격’, 눈 찌르기 등의 고문을 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홍 검사와 수사관들은 각각 징역 10월~3년을 선고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심야조사 금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인권보호 수사준칙’이 법무부 장관 훈령으로 제정됐다. 욕조와 침대를 갖춘 위압적인 분위기의 ‘특별조사실’이 폐쇄되기도 했다.

사용 안 하는 '조사실 녹화'

지난 2010년에는 서울 양천경찰서 소속 경찰관 5명이 절도와 마약 소지 혐의 등으로 조사를 받던 피의자들에게  ‘날개꺾기(뒷수갑을 채운 채로 팔을 꺾어 올리는 수법)’ 등의 폭력을 가한 일이 있었다. 당시 조현오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성과주의를 무리하게 시행한 탓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현재 직접적인 수사기관 가혹행위 사건은 뜸해졌지만 ‘인권 수사’는 아직 먼 얘기다. 가혹행위 방지를 위해 도입된 ‘피의자 영상녹화제도’는 실제 실시율이 1~2%대에 머문다. 관행처럼 이루어지는 밤샘조사ㆍ포토라인 망신주기ㆍ피의사실 공표 등은 현재 검찰 개혁 일환으로 개선 방안을 논의 중이다.

박사라 기자 park.sa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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