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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장발장' 막는 검찰 실험 "취업교육 받으면 기소유예"

중앙일보

입력

권순범(왼쪽) 전주지검장과 정영상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장이 지난 9월 10일 전주지검 회의실에서 '취업성공패키지 이수 조건부 기소유예' MOU를 맺고 기념 촬영하고 있다. [사진 전주지검]

권순범(왼쪽) 전주지검장과 정영상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장이 지난 9월 10일 전주지검 회의실에서 '취업성공패키지 이수 조건부 기소유예' MOU를 맺고 기념 촬영하고 있다. [사진 전주지검]

장발장은 가난과 굶주림 탓에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19년간 옥살이했다. 그러면서 사회에 대한 원망과 증오심을 키우게 된다. 장발장은 프랑스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장편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으로 '생계형 범죄자'의 전형으로 불린다.

전주지검, 전국 최초로 제도 도입 #고용노동부 전주지청과 MOU #만 18~34세 생계형 범죄자 등 대상 #동종 전과 없고 자활 의지 보여야 #취업난 심각한 전북 지역도 이익 #檢 "악용하면 재기소…가중 처벌"

전주지검이 '현대판 장발장'을 막기 위한 실험에 나섰다. 생계가 어려워 범죄를 저지른 청년 등에게 고용노동부의 취업 교육인 '취업성공패키지'를 받는 조건으로 재판에 넘기지 않는 제도를 도입했다. 취업성공패키지는 저소득 구직자 취업을 지원하기 위해 2009년 고용노동부가 만든 제도다. 이 프로그램을 조건부 기소유예와 연계한 건 전국 지방검찰청 가운데 전주지검이 처음이다.

전주지검은 10일 "고용노동부 전주지청과 지난 9월 10일 업무협약(MOU)을 맺고 취업성공패키지 이수 조건부 기소유예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른바 물고기 대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먹고사는 문제로 재범하는 악순환을 막고 청년 취업난이 심각한 전북 지역에도 도움을 주는 게 목표다.

권순범(왼쪽) 전주지검장과 정영상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장이 지난 9월 10일 전주지검 중회의실에서 '취업성공패키지 이수 조건부 기소유예' MOU를 맺고 약정서를 주고받고 있다. [사진 전주지검]

권순범(왼쪽) 전주지검장과 정영상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장이 지난 9월 10일 전주지검 중회의실에서 '취업성공패키지 이수 조건부 기소유예' MOU를 맺고 약정서를 주고받고 있다. [사진 전주지검]

이 제도는 권순범(50·사법연수원 25기) 전주지검장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한다. 지난 7월 전주에 부임하기 전 대검 인권부장을 지낸 권 지검장은 정영상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장과 상견례하면서 이 아이디어를 먼저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년들이 벌금을 물거나 형사 처벌까지 받으면 전과가 누적돼 취업에 큰 타격을 받는다. 외려 처벌보다는 직업 훈련을 통해 취업 기회를 주는 게 당사자나 사회에 더 이롭다"는 발상에서다.

취업성공패키지 프로그램을 알고 있던 권 지검장이 전주지검 간부들에게 청년층에게 기소유예 혜택을 주면서 지역 사회에도 이익이 될 만한 것이 뭐가 있는지 공부해 보라고 권하면서 구체적인 방안이 만들어졌다. 전주지검 측은 "단순히 실험만 하면 1년 뒤 수뇌부가 바뀌면 흐지부지될 것 같아 아예 제도화하자는 취지에서 고용노동부와 MOU를 맺었다"고 설명했다.

전주지검이 이 같은 제도를 도입한 배경에는 생계 문제로 인한 재범 우려와 전북 지역의 고질적인 청년 취업난이 자리한다. 검찰은 생계형 범죄자는 처벌 이후에도 경제적 이유로 또다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게다가 전북 지역 청년 취업률은 약 31%로 최근 10년 연속 전국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는 게 검찰 분석이다.

권순범(왼쪽) 전주지검장과 정영상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장이 지난 9월 10일 전주지검 중회의실에서 양측 간부들이 모인 가운데 '취업성공패키지 이수 조건부 기소유예' MOU를 체결하고 있다. [사진 전주지검]

권순범(왼쪽) 전주지검장과 정영상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장이 지난 9월 10일 전주지검 중회의실에서 양측 간부들이 모인 가운데 '취업성공패키지 이수 조건부 기소유예' MOU를 체결하고 있다. [사진 전주지검]

모든 범죄자가 대상이 되는 건 아니다. 생계와 관련된 범죄를 저지른 만 18~34세가 주요 대상이다. 무전취식이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서비스를 이용하는 편의시설 부정이용죄 등도 검찰이 고려하는 범죄 유형이다. 소득과 관계없이 무직·일용직·주 30시간 미만 상용직 근로자가 우선이다.

검찰은 초범이거나 동종 전과가 없고, 조사 과정에서 반성과 자활 의지를 보인 청년 위주로 제도를 시행할 예정이다. 사안에 따라 중·장년층에도 적용한다. 취업성공패키지는 1단계 상담·진단(개인 특성별 분야 결정)→2단계 직업 훈련(최장 6개월)→3단계 취업 알선 순으로 진행된다. 프로그램을 성실히 이수하는 참여자에게는 참여수당(25만원)과 훈련수당(월 40만원), 취업성공수당(150만원) 등 최대 715만원, 기업에는 연간 720만원의 보조금이 지원된다.

전주지검에 따르면 지난 9월 말부터 지난달 말까지 최근 한 달간 '취업성공패키지 이수 조건부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사람은 모두 7명이다. 자기 명의의 은행 체크카드를 빌려준 혐의(전자금융거래법 위반)로 입건된 A씨(25)와 B씨(31), 친구에게 본인 휴대전화와 은행 카드를 건네 인터넷 중고품 사기 판매에 쓰이게 한 혐의(사기방조)로 검찰 수사를 받은 C군(19) 등이다. 이들은 취업 준비생이나 신용 불량자로 보이스피싱이나 인터넷 사기 등 불법 차명 거래에 악용될 줄 알면서도 경제적으로 어렵다 보니 소액의 대가에도 통장·카드를 빌려줬다. 하지만 모두 동종 전과는 없었다.

권순범(가운데 왼쪽) 전주지검장과 정영상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장이 지난 9월 10일 양측 간부들과 함께 '취업성공패키지 이수 조건부 기소유예' MOU 체결 후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 전주지검]

권순범(가운데 왼쪽) 전주지검장과 정영상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장이 지난 9월 10일 양측 간부들과 함께 '취업성공패키지 이수 조건부 기소유예' MOU 체결 후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 전주지검]

중년층 이상도 기소유예 대상자에 포함됐다. 자동차의무보험(책임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차량을 운행한 혐의(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 위반)로 입건된 D씨(60)도 이 중 하나다. 그는 사업 실패로 경제 사정이 나빠져 자동차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도 도로교통법 위반 외에는 형사법을 어긴 적이 없었다.

전주지검 안팎에서는 "국민 세금을 들여 취업 교육을 하는데 대상자가 형사 처벌을 면하기 위해 검찰을 속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검찰은 제도를 악용해 세금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주기적으로 프로그램 참여자의 수업 태도나 상태 등을 점검하는 한편 교육 과정에서 부정이 발견되거나 합리적 이유 없이 중단할 경우 해당 참여자를 재기소해 더 무겁게 처벌할 방침이다.

전주지검 최용훈 차장검사는 "나름대로 신중한 조회와 검토·판단을 거치다 보니 아직까지 대상이 많은 편은 아니다"며 "조건부 기소유예이므로 대상자들이 혜택만 받는 게 아니라 수개월간 취업 교육을 이수해야 하는 부담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상자와 지역 사회 모두 도움이 되겠다는 판단이 서면 대검 등에 이 제도의 확산을 건의하겠다"고 덧붙였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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