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도 등돌리자…굴복한 볼리비아 대통령 “선거 다시하자”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간) 수도 라파스에서 대통령 선거 재실시 방침을 발표하고 있다.[AP=연합뉴스]

최근 4연임에 성공했던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이 돌아선 민심에 결국 굴복했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달 치렀던 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르겠다고 10일(현지시간) 발표했다. 개표 조작 의혹이 제기되고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경찰들까지 시위에 합류한 데 따른 결과다.

10월20일 대선 개표조작 의혹 #대통령궁 경찰까지 시위 가세 #9일 OAS 감사결과가 결정적

BBC에 따르면 모랄레스 대통령은 이날 “미주기구(OAS)의 감사 결과를 받아들여 선거관리위를 재정비하고 다시 선거를 치르겠다”고 밝혔다. 전날 OAS는 지난달 20일 실시된 볼리비아 선거 결과가 유효하다고 볼 수 없다면서 “선거 절차를 다시 진행하길 권고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현재의 긴장 상태를 줄이기 위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며 “우리는 볼리비아를 안정시킬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선거를 다시 해 볼리비아 국민이 새로운 대통령을 민주적으로 선출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9일(현지시간)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볼리비아에서는 지난달 20일 실시된 대선 1차 투표 직후 대선 개표 조작 의혹이 불거지며 반정부 시위가 20여일 넘게 계속되고 있다. 시위 규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지난 9일 대통령궁 경호 경찰을 비롯해 주요 도시 경찰들이 모랄레스 대통령 지지를 철회한다고 밝히고 시위대에 합류했다. 행정수도 라파스의 대통령궁을 지키던 경찰 수십명은 제복을 입은 채 반정부 시위대와 함께 행진을 벌였다. 시위대는 자신들과 한편에 선 경찰들에 환호했다. 이들은 시위 참가 이후에도 대통령궁으로 복귀하지 않고 지역 경찰본부로 향했다.

라파스 외에도 사법 수도 수크레, 경제수도로 불리는 산타크루스 등 최소 5개 도시 경찰들이 항명에 가담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최소한 한 개 지역 경찰본부를 장악했다고 주장했다. 반정부 시위대는 이날 저녁 모랄레스 정부의 선전도구로 여겨지던 국영방송 볼리비아나까지 점거했다. 시위대의 점거 이후 뉴스 프로그램 제작은 중단됐고 과거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만 방송되고 있다.

볼리비아 반정부 시위대가 10일(현지시간) 수도 라파스의 거리에서 플래카드와 볼리비아 국기를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AP=연합뉴스]

모랄레스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치러진 대선 개표 결과 47.08%를 얻어 야당 후보인 카를로스 메사 전 대통령에 10%포인트 이상 앞선 것으로 집계됐다. 결선투표까지 갈 필요 없이 당선을 확정지은 것이다. 하지만 개표가 84% 진행됐을 때까지만 해도 득표율 차이는 7%에 불과했다. 개표가 돌연 중단됐다가 다시 시작됐을 때 모랄레스 대통령이 갑자기 큰 표차로 앞섰기 때문에 개표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다.

실제로 투표를 적극적으로 참관해왔던 OAS는 9일 예비 보고서를 통해 “볼리비아의 투표 과정에 명백한 조작이 발견됐다”며 “지난달 20일 투표 결과를 검증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이들은 “감사 과정에서 변경과 위조 서명, 대규모의 데이터 조작 증거 등 물리적인 기록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지지 기반인 라파스 외곽 엘 알토에서방송 연설을 하며 “쿠데타가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위가 격해지고 OAS가 사실상 부정선거를 인정한 보고서를 공개하자 결국 재선거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