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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트집 잡는 ‘개도국 특혜’ 버리고 통상 압박에 대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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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8호 05면

‘WTO개도국 지위 유지관철 위한 농민공동행동’ 회원들이 24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WTO개도국 지위포기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WTO개도국 지위 유지관철 위한 농민공동행동’ 회원들이 24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WTO개도국 지위포기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개도국) 지위를 포기하겠다고 25일 선언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우리 경제의 위상, 대내외 여건, 경제적 영향을 두루 고려해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했다”며 “농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정책·재정지원에 대한 논의를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주재한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다.

WTO 개도국 지위 포기 파장 #특혜 고집 땐 중국처럼 마찰 가능성 #“미래 협상에 한해서 포기하는 것” #수입 쌀 513% 관세, 농가 보조금 #예외적인 보호조치 유지하기로

내년 6월 WTO 통상장관 회의 주목

정부의 이번 결정엔 미국의 통상 압박과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 대응하기 위한 카드로 활용하겠다는 계산이 작용했다. 한국이 개도국 지위를 고집할 경우, 미·중 무역분쟁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개도국 특혜’를 계속 누리고 싶어하는 중국처럼 미국과 맞서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 자동차 관세 등을 포함한 통상 문제, 내년 방위비 분담금 협상 등을 고려하면 미국과 관계를 좋게 가져가는 것이 유리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다른 현안에서 우호적인 협상 분위기를 조성하겠다는 의도다.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더라도 당분간 관련 혜택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됐다. 홍 부총리는 “개도국 지위 포기가 아니라 미래 협상에 한해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의 번역 오류를 밝혀낸 송기호 통상전문 변호사도 “기존 WTO 협정에 명시된 개도국으로서 한국의 권리나 이행의무가 이날 선언으로 바뀌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실제 1995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에 따라 결정한 현재 농산물 관세율이나 농업보조금총액(AMS)은 새로운 국제협상이 끝날 때까지 유지된다.

미국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인도 등이 선언한 개도국 지위를 트집 잡았다. 미국은 2001년 시작된 도하개발어젠다(DDA)에서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DDA가 답보상태에 빠지며 개도국 지위 논란은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7월 트위터를 통해 “WTO 개도국이 불공평한 이득을 얻고 있다”며 미 무역대표부(USTR)에 향후 90일 내 WTO 개도국 기준을 바꿔 개도국 지위를 넘어선 국가가 특혜를 누리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중국을 겨냥한 트윗이지만 한국도 거론했다. 여기 따른 ‘데드라인(23일)’은 이미 지났다.

개도국 기준

개도국 기준

트럼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이면서 주요 20개국(G20) 회원이고, 세계은행에서 분류한 고소득 국가인 동시에 세계 상품무역에서 비중이 0.5% 이상 되는 국가가 개도국에 포함되면 안 된다고 강조했는데 한국은 이들 기준에 모두 부합한다. 트럼프가 지목한 국가 중 싱가포르·브라질은 개도국 지위를 포기했고, 중국은 거부했다. 통상전문 송 변호사는 “(트럼프가 제시한 기준을 바탕으로) 개도국 기준을 명확하게 정하는 협상이 조만간 열릴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미 의회는 이달 초 내놓은 WTO 미래에 관한 보고서에서 내년 6월 열리는 WTO 통상장관 회의를 D-데이로 제시했다. “트럼프가 제시한 개도국 기준이 중국·인도 등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조금은 완화될 수 있다”며 “하지만 기존 자기 선언에서 준칙(rule)주의로 바뀔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송 변호사는 말했다.

한국의 개도국 역사는 95년 WTO 출범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은 농산물 무역적자 악화, 농가소득 저하, 농업기반시설 낙후 등을 이유로 농업 분야에서 개도국 지위를 택했다. WTO 개도국은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할 수 있고, 국내 생산품에 보조금을 지급할 수 있다. 또 회원국이 합의한 관세 인하 폭과 시기 조정 등에서 상대적으로 느슨한 규제를 적용받는다.

그런데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IGE) 명예이사장은 “해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개도국 회의에서 한국 대표단은 참 멋쩍었다”며 “다른 개도국 대표들이 ‘왜 한국이 여기에 오냐?’고 힐난하곤 했다”며 “한국의 개도국 지위는 국제사회 웃음거리”라고 전했다.

“소농 보호 위한 의제 적극 제시해야”

농민의 반발이 변수다. 농민단체는 정부 방침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여나갈 예정이다.  농민단체의 주요 요구 사항은 ▶공익형 직불제 도입 ▶농업 예산 확대(전체 예산의 4%) ▶농가 소득 보장 ▶농산물 가격 안정 대책 ▶통상·식량 주권 실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민·관 합동 특별위원회 구성 등이다. 정부는 개도국 포기와 상관없이 쌀 등 일부 농산물에는 예외적인 보호조치를 추진할 계획이다. 수입 쌀에 대한 513% 관세도 유지할 방침이다. 보조금 역시 WTO 특례조항을 활용해 유지할 가능성이 엿보인다.

그런데 송 변호사는 “정부가 내부 대책뿐 아니라 언젠가는 재개될 DDA 협상을 대비한 전략도 마련해야 한다”며 “한국이 선진-개도국 프레임을 초월해 기후변화 시대에 의미가 되살아나고 있는 소농을 보호하기 위한 의제를 협상 국면에서 적극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소농은 미국 카길 등 곡물 메이저가 기후변화 주범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면서, 대안으로 꼽히고 있다. 개도국뿐 아니라 선진국에도 적지 않다. 한국이 기후변화를 근거로 소농보호 의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면 개도국뿐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호응하는 나라가 적지 않을 수 있다.

강남규 기자, 세종=김기환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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