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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닥 기업 회장님 21명, 이스라엘로 달려간 까닭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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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정재송 제이스텍 회장 등 코스닥협회 소속 상장사 오너들이 지난달 25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페레스 평화혁신센터를 찾아 가상현실(VR) 기기를 이용해 이스라엘의 주요 기업과 기술을 경험하고 있다.

정재송 제이스텍 회장 등 코스닥협회 소속 상장사 오너들이 지난달 25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페레스 평화혁신센터를 찾아 가상현실(VR) 기기를 이용해 이스라엘의 주요 기업과 기술을 경험하고 있다.

 지난달 22일 이스라엘 제1의 도시 텔아비브 해변 칼튼호텔에 중ㆍ노년 한국 남성 20여 명이 나타났다. 셋 중 둘은 검게 찌든 피부, 듬성듬성하거나 하얗게 쉰 머리를 한 초로의 신사들이었다. 여느 관광객처럼 편안한 캐주얼 차림이었지만, 이들의 정체는 한국 코스닥시장을 대표하는 임원 기업 오너 회장들이었다. 신산한 세월을 이겨낸 흔적인 듯한 모습의 신사들은 창업 1세, 낯빛이 밝고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가업을 승계한 2세들이었다.

6박7일 일정으로 혁신기업 탐방 #기술지주사·스타트업 등 찾고 #벤처캐피털 등 에코시스템 확인 #"실패 용인되는 환경 만들어야"

‘코스닥 회장님’들이 이역만리(異域萬里) 이스라엘을 단체로 찾은 까닭이 뭘까. 이들은 코스닥협회가 주관한 ‘2019 이스라엘 4차 산업혁명 혁신기업 탐방단’의 일원이었다. 사실상 여행일정으로 점철된 무늬만 탐방단이 아니었다. 6박7일의 일정 중 첫 공식 행사가 시작된 둘째 날 오전은 숙소인 칼튼호텔 회의장에서 이스라엘 창업 생태계 강의를 듣고 토론을 하는 자리였다. 이스라엘 벤처 투자펀드 YEOC를 이끌고 있는 에후드 올메르트(74) 전 총리가 기조강연자로 나서 행사의 문을 열었다.

올메르트 전 총리는 한국 기업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그는 평소 기아차인 K9을 타고 다니며, 1년에 3~4회 한국을 찾는 대표적 친한파(親韓派) 고위 인사다. 그는 “일본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기업인들의 열정과 기술력으로 봤을 때 짧은 시간 안에 한국이 일본을 넘어설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혁신 기술을 바탕으로 한 스타트업 기업의 창업과 투자를 위한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코스닥 상장사 오너들이 지난달 22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열린 '이스라엘 창업 생태계'세미나 만찬행사에서 에후드 올메르트 전 이스라엘 총리의 얘기를 듣고 있다.

.코스닥 상장사 오너들이 지난달 22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열린 '이스라엘 창업 생태계'세미나 만찬행사에서 에후드 올메르트 전 이스라엘 총리의 얘기를 듣고 있다.

오후에는 이스라엘 스타트업 대표 네 명의 기업 소개와 개별 기업 간 1대1 미팅이 이어졌다. 가상ㆍ증강 현실 데이터 분석업체, 시각정보 인공지능, 바이오 진단ㆍ의약ㆍ의료기기 등과 관련된 스타트업들로,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세계 주요 방송ㆍ신문에서 주목하고 있는 역량 있는 기업들이었다. 중간 중간 코스닥 기업 대표들의 탄성과 한숨소리가 이어졌다. 이날 행사는 올메르트 전 총리와 정부 관계자까지 참석한 저녁 만찬행사까지 이어져 오후 10시가 돼서야 끝이 났다.

만찬장에서 만난 반도체장비 제조사 뉴파워프라즈마의 최대규 회장은 상기된 얼굴로 “여기 온 사람들은 그래도 코스닥협회에서 임원을 맡을 정도로 경영사정이 상대적으로 좋은 사람들이지만 회사를 지켜내기가 너무 힘들다”면서 “요즘 최저임금과 주 52시간제, 일본의 수출규제로 인한 한ㆍ일 갈등 등이 우리 중소기업들의 목을 직간접적으로 조여오고 있다”고 토로했다.

최 회장은 “요즘은 미래가 극히 불투명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다들 투자를 꺼리고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며 “언제까지 이런 위기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기술력 뛰어난 한국기업이 이스라엘처럼 세계로 뻗어나가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털어놨다.
반도체 테스트 장비 제조사 ISC의 정영배 회장은 “스타트업 생태계가 잘 돼 있는 이스라엘에서 기술력 있는 스타트업을 찾으려고 한다”며 “한국은 스타트업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가 안 만들어져 있어 안타깝다. 실패해도 얼마든지 일어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코스닥 상장사 오너 대표들이 지난달 25일 이스라엘 텔아비브 남부의 페레스 평화혁신센터를 찾았다. 오늘날 '창업국가' 이스라엘을 만든 시몬 페리스 전 총리를 기념하는 곳이다.

코스닥 상장사 오너 대표들이 지난달 25일 이스라엘 텔아비브 남부의 페레스 평화혁신센터를 찾았다. 오늘날 '창업국가' 이스라엘을 만든 시몬 페리스 전 총리를 기념하는 곳이다.

다음날부터 이어지는 이후 일정은 ‘스타트업 내이션(Start-up)’ 이스라엘의 창업 생태계 곳곳을 직접 찾아가 보는 시간이었다. 세계 5대 기초과학연구소 중 하나라는 와이즈만연구소의 세계 최고ㆍ최대 기술지주회사 예다와 수많은 스타트업들의 산실인 히브리대학, 이스라엘 최대 블록체인 기업 옵스(ORBS), 세계 최대 제네릭 제약사 테바, 초고속 배터리 충전기업 스토어닷, 이스라엘 최대 펀드사 빈티지, 자율주행 시스템 기업 모빌아이 방문 등으로 진행됐다. 코스닥 기업 대표들은 대학ㆍ연구소에서 시작되는 기술 상용화가 스타트업 창업을 낳고, 이후 투자와 인수ㆍ합병(M&A), 미국 나스닥 상장 등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기업들의 혁신 생태계를 체험할 수 있었다.

사실 코스닥 기업들은 요즘 몸도 마음도 편치않다. 소재ㆍ부품ㆍ장비로 대표되는 일본의 수출규제에 한국 주력 대기업들이 겪고 있는 불황의 그늘을 1차 협력업체로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코오롱생명과학의 인보사 사태를 비롯한 바이오업계의 고전 역시 악재다.

사이버보안회사 드림시큐리티의 범진규 대표는 “2년 전 회사를 코스닥에 상장시켰지만, 국내시장 규모가 작아 올해 초 미주법인을 세워 글로벌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며 “이스라엘은 한국보다 더 작은 시장이지만 기업이 처음부터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시장을 노리다 보니 매출 규모도 품질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코스닥협회장을 맡고 있는 정재송 제이스텍 회장은 “한국의 코스닥 기업들은 지금 성장의 한계에 와 있다. 그간 삼성ㆍ현대 등 대기업의 1,2차 벤더로서 같이 성장해왔지만, 지금은 대기업들과 함께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며 “인구 900만도 안되는 소국에 국토의 70%가 사막과 광야인 나라가 두뇌 하나로 세계시장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비결을 몸으로 확인하는 일정이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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