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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인생' 이용식 "내가 서해 대청도서 태어난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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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가수로 데뷔… 1975년 MBC 공채 개그맨 1기
젊은 후배들 능력·끼 발산할 수 있는 무대 만드는 게 남은 소원

월간중앙·대한노인회중앙회 공동기획 同行(2) - 존경받는 시니어, 골드보이가 간다 #“남을 즐겁게 해줄 수 있다는 건 크나큰 축복”

‘뽀식이’ 이용식은 ’즐거워하는 사람보다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 10배쯤 더 행복하다“면서 ’훗날 묘비에 ‘아, 좀 더 웃길 수 있었는데’라는 문구를 새기고 싶다“며 웃었다.

‘뽀식이’ 이용식은 ’즐거워하는 사람보다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 10배쯤 더 행복하다“면서 ’훗날 묘비에 ‘아, 좀 더 웃길 수 있었는데’라는 문구를 새기고 싶다“며 웃었다.

45년차 개그맨 이용식(67)은 요즘도 바쁘다.

그는 전국 각지의 크고 작은 축제에 진행자(MC)로 자주 초대된다. 한 달에 두세 번은 대한가수협회의 지방공연(낭만콘서트) MC를 맡아 팬들과 만난다.

이용식은 KBS의 대표적인 장수 프로그램인 [아침마당]에도 4년째 고정 패널로 출연하고 있다. 또 종합편성채널 채널A의 [나는 몸신이다]에도 나가 팬들과 만나고 있다.

월간중앙이 덩치만큼이나 마음 씀씀이가 넉넉하기로 소문난 ‘뽀식이’ 이용식을 8월 9일 서울 여의도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는 “개그맨 출신이지만 가수나 연기자들과 더 가까울 정도로 연예계 선후배들과 두루 친하게 지내고 있다”며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잘나가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려고 한 적은 없다”고 했다. 이어 “지금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엄청난 축복이니 끝까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살려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근황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지내세요?

“열심히 건강 챙기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전국에서 열리는 각종 축제와 행사에 출연하고 있고, 대한가수협회 주최 지방공연에서도 MC를 맡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방송사 두어 군데의 인기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고 있습니다. 또 시간이 날 때면 선후배들과 어울려 식사도 함께하고 이야기도 나눕니다. (개그맨) 김정열이나 황기순은 지금도 제가 밥 먹자고 하면 달려올 걸요?”

일용이가 대신 내준 개그맨 지원서

2002년 8월 고(故) 이주일씨 빈소에서 오열하고 있는 이용식.

2002년 8월 고(故) 이주일씨 빈소에서 오열하고 있는 이용식.

데뷔 50년 가까이 됐죠?

“1975년 MBC 개그 콘테스트를 통해 정식으로 데뷔했습니다. 우리나라 개그맨 중에서는 최초로 공채를 통해 데뷔한 게 바로 접니다. 그전에 개그맨 선배님들은 유랑극단이나 연극배우 출신들이 대부분이었죠. 고(故) 구봉서 선생님도 아코디언 연주를 하다 개그맨으로 발탁되신 경우고요. 1969년에 MBC TV가 개국하면서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젊은 피를 수혈하기 위해 1975년에 개그맨 공채를 시작했어요. 그전에도 TBC나 MBC 등 방송사들의 탤런트 공채는 있었지만 개그맨 공채는 MBC가 처음이었지요. 당시 공채 때 구봉서·배삼룡·서영춘·이기동·이대성·남철·남성남·송해 선생님 등 10명이 심사위원이었습니다. 1400명 정도 지원했다고 들었는데 저를 비롯해 11명이 운 좋게 뽑혔던 겁니다.”

이용식의 말처럼 그는 대한민국 공채 개그맨 1기 출신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용식은 통기타 가수로 제법 왕성하게 활동했었다. 1971년 언더그라운드 라이브클럽에서 데뷔한 이용식은 이듬해인 1972년 뮤지컬 배우로도 데뷔했다. 그러다 1975년 우연한 기회에 개그맨으로 변신하게 됐다.

개그맨 이전에 가수로 활동했군요?

“처음에는 돈가스나 생맥주를 파는 경양식집 같은 곳에서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했었죠. 서유석, 양희은, 듀엣 ‘4월과 5월’의 백순진, 이수만 등이 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다 1972년께 청평에서 열린 통기타 페스티벌에 친구들과 함께 나가서 2등을 했어요. 당시 1등은 ‘엄마는 아빠를 좋아해’라는 노래의 듀엣 바블껌이었어요.”

기타를 들고 데뷔했지만 운명은 피해갈 수 없었나 보다. 어려서부터 동네에서 구봉서로 불릴 만큼 이용식은 입담이 좋았다. 동네에서 이용식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구봉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정도였다. 그런 이용식에게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전원일기]에서 일용이 역을 맡았던 탤런트 박은수(72)가 “용식아, 너 개그맨 시험 한 번 봐라”며 등을 떠민 것이다. 이용식은 4형제 중 막내였는데 바로 위 형의 절친한 친구가 박은수였다. 박은수는 이용식을 대신해서 MBC에 지원서를 내줬고, 이용식은 친구 양복을 빌려 입고 부랴부랴 시험을 보러 가야 했다. 단계별 테스트를 무난하게 통과한 이용식은 최종 면접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고, 이후 일정한 교육과정을 거친 뒤 정식 개그맨으로 데뷔하게 됐다.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이나 역할은 무엇인가요?

“지금까지 제가 출연한 작품이나 맡았던 역할이 얼마나 되는지는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래도 [웃으면 복이와요]나 [일요일 밤의 대행진]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많이 남네요.”

연예계 생활 45년 동안 이용식이 출연한 프로그램이나 찍었던 CF 그리고 발표한 음반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야말로 영역을 가리지 않는 종횡무진 활약이었다. 사람들에게 덜 알려져서 그렇지, 이용식이 발표한 음반만 해도 20장이 넘을 정도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그의 말처럼 이용식이 출연했던 프로그램은 정확하게 집계하기 어려울 정도다.

외동딸 생각하며 죽을 고비 넘겨

2000년 12월 어린이 병원학교 개교식에 참석한 이용식(뒷줄 왼쪽 둘째).

2000년 12월 어린이 병원학교 개교식에 참석한 이용식(뒷줄 왼쪽 둘째).

자신을 행운아라고 생각하세요?

“MBC에서 1년쯤 활동한 뒤 곧바로 군입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뒤 문선대로 배치된 겁니다. 군대 안팎에서 공연을 하는 문선대라는 곳에 가 봤더니 탤런트 유인촌씨 등이 이미 활동하고 있더군요. 저는 군입대는 했지만 밖에서 하던 일을 그대로 이어갈 수 있었고, 36개월 동안 오히려 실력을 키워갈 수 있었습니다. 큰 행운이었죠. 그리고 전역 후 다시 MBC에 들어갔는데 [뽀뽀뽀]가 신설됐어요. 담당 PD가 김병조·이용식·왕영은 세 사람을 부르더니 ‘최초로 전문 어린이 프로그램이 생겼으니 잘해 달라’고 당부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뽀병이’, ‘뽀식이’, ‘뽀미 언니’가 탄생하게 된 겁니다. [뽀뽀뽀]에만 19년 동안 고정 출연했었죠. 그때 그 프로그램을 즐겨 보던 친구들이 다들 시집·장가갔고 곧 자녀들을 출가시킬 나이가 됐으니….”

19년이라면 에피소드도 많았을 텐데요.

“[뽀뽀뽀]는 미취학 어린이, 그러니까 유치원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었잖아요? 근데 실제로는 초등학생들도 굉장히 많이 봤어요. 그러다 보니 학교에 지각하는 일도 생기고,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출근하려던 아빠들까지도 직장에 늦는 경우가 많았던 겁니다. 그래서 MBC에 ‘프로그램을 좀 더 빨리 시작할 수 없냐’는 항의 전화가 꽤 많이 왔었습니다.”

[뽀뽀뽀]는 1981년부터 32년 동안 이어진 MBC의 대표적인 장수 프로그램 중 하나다. 이용식은 프로그램 신설 때부터 20년 가까이 고정 출연하며 어린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이용식에게 ‘뽀식이’란 별명이 생겨난 것도 이때다.

가장 큰 고비는 언제였나요?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어요. 23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보름 후쯤 저에게도 심근경색이 발병했어요.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저 역시 그게 어떤 병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어요. 워낙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주위에서 ‘이용식이 의사보다 심근경색에 대해 더 많이 안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죠. 그런 저에게 심근경색이 찾아온 겁니다. 저는 응급실 침대에 누워서도 주먹을 꽉 쥔 채 반드시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그리고 얼마 뒤 수술실 문틈 사이로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고 있는 여섯 살짜리 수민이가 보이더라고요. ‘아, 수민이가 어떻게 해서 낳은 아이인데…. 내가 여기에서 죽을 순 없지. 반드시 살아서 이 병원을 나가리라’고 굳게 다짐했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보람은 저랑 똑같이 생긴 외동딸 수민이에요(웃음).”

이용식은 김외선씨와의 사이에 외동딸 수민이를 두고 있다. 이용식 부부는 결혼 8년여 만인 1991년에 수민이를 얻었다. 이용식은 “결혼 후 오랫동안 아이가 안 생기길래 다 포기하고 입양할까 고민하던 차에 수민이가 생겼다”며 “수술대에서도 의사에게 ‘저 아이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갈 수만 있게 해달라. 평생 은인으로 모시겠다’며 간청했다”고 회고했다.

딸 수민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용식. 1993년 여름 날의 사진이다.

딸 수민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용식. 1993년 여름 날의 사진이다.

“연예인은 끼·노력·운 맞아야”

1988년 후배 개그맨 황기순과 함께 익살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용식.

1988년 후배 개그맨 황기순과 함께 익살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용식.

어떤 마음가짐으로 연예계 생활을 하시나요?

“솔직히 저는 연예인 중에서 톱은 아닙니다. 또 톱으로 사는 게 제 인생의 목표도 아니었고요. 하지만 구봉서 선생님이나 송해 선생님처럼 오랫동안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건 목표이자 소원입니다. 제 개그를 보고 웃는 분들이 느끼는 행복이 100이라면 그분들을 웃게 해주는 저의 행복은 그 10배쯤 될 겁니다.”

가장 안타까웠던 순간은 언제였어요?

“이주일(1940~2002) 형님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큰 인기와 가장 큰 부를 얻었던 분인데 오래 살지 못했어요. 아들을 먼저 보냈다는 스트레스를 결국 이기지 못했던 것 같아요(이주일의 7대 독자는 1991년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생을 마감하기 한 달쯤 전에도 형님은 한 시간에 한 번씩 아들 이야기를 했을 정도였어요. 병원 창 밖을 보다가도 ‘용식아, 저 사람 아들이랑 같이 가네’라곤 했죠. 의사에게서 한 달 후쯤 형님이 돌아가실 것 같다는 말을 전해들은 뒤 저는 모든 스케줄을 다 취소하고 곁에서 말벗을 해드렸는데….”

이용식은 이주일과 관련된 비화도 한 가지 공개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인연이 깊은 이주일은 정 명예회장에게 홍송(紅松) 세 그루를 선물받았다고 한다. 이주일은 홍송 세 그루를 분당 자택 정원에 심고 애지중지 길렀다. 그런데 그렇게 잘 자라던 홍송 세 그루가 이주일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부터 이유 없이 시들더니 끝내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용식은 “믿기지 않는, 참으로 신기한 일인데 내 눈으로 직접봤다”고 했다.

연예인이 된 데 대해 후회한 적은 없어요?

“털끝만큼도 없어요. 저한테 너무 맞는 직업이에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초등학생 때부터 이 길이 조금씩 열렸던 것 같아요. 사실 가수의 꿈이 있어서 기타를 쳤던 건 아니었어요. 개그맨이 되고 싶긴 했는데 당시만 해도 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서수남·하청일 형님들처럼 노래하면서 콩트도 하는 그런 스타일의 연예인이 되려 했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던 것처럼 박은수 형이 느닷없이 MBC에 지원서를 대신 내주는 바람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임하룡처럼 엄살 부려야 장수합니다 ”

장수 어린이 프로그램 [뽀뽀뽀]를 이끌었던 ‘뽀식이’ 이용식(오른쪽)과 ‘뽀병이’ 김병조.

장수 어린이 프로그램 [뽀뽀뽀]를 이끌었던 ‘뽀식이’ 이용식(오른쪽)과 ‘뽀병이’ 김병조.

연예인은 어떤 직업일까요?

“끼·노력 그리고 운, 이 세 가지가 잘 맞아야 하는 직업이에요. 그런데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성공했다 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가장 중요한 심성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심성이 좋아야 이 험난한 연예계에서 외로운 ‘하이에나’로 살지 않아요. 객관적으로 보면 성공한 연예인인데 주위를 살펴보면 사람이 없는 경우가 더러 있어요. 그 이유는 심성이 덜 갖춰졌기 때문인 것 같아요. 혼자 사는 건 연예인이 아니에요. 같이 어울려 살 수 있어야 진정한 연예인이에요.”

특별히 친한 동료들은 누구인가요?

“저는 진짜 두루두루 친해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려 하지 않아요. 한쪽만 가깝게 하다 보면 나중에 소문이 나게 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서운해하고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자리나 모임에는 어지간하면 나가려 하지 않습니다. 또 나이를 먹고 선배가 돼보니 후배들에게 오는 전화 한 통이 감사하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송해(92) 선생님도 후배들의 전화를 얼마나 감사해하시는지 몰라요. 송해 선생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더 할게요. 저만 보시면 ‘용식아 [전국노래자랑] 다음 MC는 너야 너. 근데 나는 160세까지 할 거다’라고 하십니다(웃음).”

생활신조나 좌우명이 있나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건 그 자체로 대단한 축복입니다. 감사하며 겸손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내가 죽고 나면 묘비(墓碑)에 ‘아, 좀 더 웃길 수 있었는데’라는 문구를 새기고 싶습니다. 그만큼 아쉬운 거죠(웃음).”

꼭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요?

“요즘에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거의 없어요. 정통 코미디 프로그램으로는 KBS의 [개그콘서트]가 유일한 것 같아요. 오죽했으면 제가 몇 해 전에 모 방송사 앞에서 코미디프로그램 만들어 달라고 ‘1인 시위’까지 했을까요? 어떤 후배들은 리스(lease)로 어렵게 장만했던 차량 반납하고, 어떤 후배들은 밤에 대리운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젊은 개그맨 후배들이 설 만한 무대가 없기 때문이죠. 열정 많고 능력 있는 후배들이 마음껏 끼를 발산하며 생활도 할 수 있는 무대를 제 손으로 꼭 만들고 싶어요.”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저는 엄살이 굉장히 심해요. 예를 들어 출연한 프로그램에서 채혈을 통해 ‘간’을 검진한다면 저는 개인적으로 비용을 더 보태서 종합검진에 준하는 전신 검사를 합니다. 제 생각에는 엄살 심한 사람이 오래 살 것 같아요.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개그맨 임하룡이 가장 오래 살 것 같아요. 그 친구는 손등에 뾰루지 하나만 나도 ‘어, 이거 혹시 피부암일지도 몰라’라며 병원으로 달려갑니다(웃음).”

이용식은 올해 3월 TV조선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과로하며 혈압 관리를 못했다”며 “‘피곤해서 그렇구나. 쉬어야지’라고 생각만 하고 방치했는데 그렇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가족들이 걱정하는 게 싫어 숨기고 있었지만 나처럼 골든타임을 놓치는 사람들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개하게 됐다”며 “시력을 잃은 후 눈동자가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도록 시선처리까지 부단히 연습했다”고 밝혔다.

“선배로 살기보다 어른으로 살아요”

1980년대 후반 하이틴 스타로 각광받았던 가수 이정현, 이용식 큰형의 아들이다.

1980년대 후반 하이틴 스타로 각광받았던 가수 이정현, 이용식 큰형의 아들이다.

가족관계가 궁금하군요.

“(1983년에) 결혼해서 8년여 만인 1991년에 수민이를 낳았어요. 진짜 어렵게 얻은 아이입니다. 아내랑 수민이와 살고 있지요. 그리고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인기를 얻었던) 가수 이정현(53)이 큰형님의 아들, 그러니까 조카입니다. (‘그 누구보다 더’,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등을 부른) 정현이의 아내는 SES의 초창기 히트곡인 ‘너를 사랑해’ 등을 만든 인기 작곡가(최수정)이고요. 외국계 회사의 한국 지사에 다녔던 큰형님은 젊어서 호주로 이민을 가셨지만, 나중에 정현이는 정리하고 들어왔고 지금 가족과 함께 일산에서 살고 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인터뷰가 마무리돼 갈 무렵, 이용식은 아픈 가족사를 떠올렸다. “사실 아버지는 북파 공작원이었다. 군번조차 없었다. 평안남도 진남포항에서 배에 기름을 넣고 배급하던 지배인이었다. 그때 군용 배에 기름을 배급하면서 무슨 일이 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진남항에서 샛별호를 나포해서 가족들에게 말도 없이 월남을 했다.”

아버지의 월남 후 이용식의 어머니와 세 형은 북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대나무를 깎아서 뾰족해진 가시를 어머니 손톱 밑에 찌르면서 ‘아버지가 어디 갔냐’고 물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어머니는 정말 몰랐기 때문에 대답을 못했다. 그 일로 아버지는 남으로 내려온 뒤로도 늘 어머니께 늘 죄지은 마음으로 사셨다.”

국군의 북진 당시 가족을 찾아온 이용식의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대청도(인천 옹진)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막내아들 이용식을 낳았다. 이용식은 “나중에 아버지에게 ‘내가 남쪽에 간다고 말을 하고 갔다면 우리 가족은 인민재판에 넘어갔을 텐데 진짜 몰라서 말을 안 했기 때문에 그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인생 후반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요?

“내 건강 그리고 가족의 건강입니다. 가까운 가족의 건강이 나빠지면 나 역시 무너지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리고 큰 욕심부리면 안 될 것 같아요. 사실 제가 굉장히 욕심이 많았어요. 하지만 욕심이 너무 많으면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더라고요. 대신 긴장할 땐 긴장은 해야죠. 긴장하지 않으면 오래갈 수 없어요. 50년쯤 했다고 해서 대본도 대충 보고 방송에 나가면 결국 티가 나게 돼 있어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재미없는 소리를 하면, ‘이용식이 재미없다’고 하지 ‘제작 PD나 작가가 재미없다’고 합니까? 또 하나, 후배들에게 자꾸 가르치려 들면 안 돼요. 선배로 사는 것보다 어른으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또래의 팬들에게 인사 말씀을 전한다면.

“저 혼자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 저를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여기까지 오게 해주신 겁니다. 지금도 저를 보는 분들 중에서 스스럼없이 배 만지고 엉덩이 만지는 분들이 있다니까요. 심지어 수산시장에 가면 ‘아이고 TV로 보는 것보다 생물이 낫네’라고 하는 분들도 있어요. 내가 생선도 아닌데 실물이 아닌 생물이라니(웃음). 그런데 그분들 덕분에 여기까지, 오늘날까지 이용식이 올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교만하지 않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사진 김경빈 선임기자 kgbo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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