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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집중해 부·권력 대물림, 그런 인생이 전부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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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야마현 800m 산골짜기에 위치한 도가 마을을 40여년 노력 끝에 연중 연극제·예술제가 열리는 세계적인 명소로 키워낸 스즈키 다다시 연출가. 8월 23일부터 9월 23일까지 도가 연극촌에서 열리는 제9회 연극올림픽을 맞아 그의 소회를 들었다. 도야마현(일본)=강혜란 기자

일본 도야마현 800m 산골짜기에 위치한 도가 마을을 40여년 노력 끝에 연중 연극제·예술제가 열리는 세계적인 명소로 키워낸 스즈키 다다시 연출가. 8월 23일부터 9월 23일까지 도가 연극촌에서 열리는 제9회 연극올림픽을 맞아 그의 소회를 들었다. 도야마현(일본)=강혜란 기자

“많은 사람들이 도쿄에만 밀집해서 부모들 돈과 힘으로 좋은 학교 들어가고 출세한다. 예전엔 안 그랬다. 우수한 지방 인재들이 도쿄 가서 공부한 뒤 지역을 위해 공헌했다. 지금은 좋은 배우자 만나서 중앙 권력을 장악하고 대물림한다. 그와 다른 인생을 꿈꾸는 사람이 여기 모인다.”

일본 연극 혁신 이끈 스즈키 다다시 #산골 도가마을 국제 명소로 탈바꿈 #'벤치마킹'한 이윤택 '미투 몰락'에 # "나는 연극 아닌 사회변화가 목표"

일본 도야마(富山)현 난토(南礪)시 도가(利賀)예술공원(연극촌)에서 만난 연출가 스즈키 다다시(鈴木忠志·80)의 말이다. 도가 연극촌은 해발 800m에 위치해 인구 400명밖에 되지 않지만 요즘 세계 연극인이 가장 주목하는 장소다. 스즈키 다다시가 이끄는 도가 상주극단 ‘스즈키 컴퍼니 오브 도가’(SCOT)가 있고 그가 창시한 배우 훈련법 ‘스즈키 메소드’를 직접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3일 도가 연극촌에선 제9회 연극올림픽이 개막했다. 극단 자유의 ‘이름없는 꽃은 바람에 지고’(극작 김정옥, 연출 최치림) 공연 일정에 맞춰 도가마을을 방문했다. “한·일 관계가 어렵지만 문화 교류는 이어져야 한다는 판단”(최치림 연출)에 예정됐던 공연은 지난 6, 7일 성황리에 이뤄졌다. 지난 7일 이곳에서 만난 여든의 연출가로부터 반세기에 걸친 꿈과 프로젝트를 들어봤다.

외딴 산골마을에서 열리는 연극제라기엔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온다.

“올해 연극올림픽에는 16개국 30개 작품이 올려지는데 관객 수는 약 2만명으로 예상한다. 이 중 연극 관계자는 450명 정도다. 그 외엔 대학교수, 평론가, 저널리스트, 정치가, 기업가들도 포함된 일반 관객이다. 집행위원장을 (세계적 지퍼생산기업인) YKK그룹 회장이 맡고 있고, 200개 기업에서 후원에 동참했다.
이렇게 많이 호응하는 이유는 연극촌이 연극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서다. 나는 도쿄에 대부분 것들이 집중된 게 잘못됐다고 생각했고 그걸 고치려 했다. 일본을 바꾸기 위한 문화 모델이자 샘플로 운영하고 있다.“

지난 7일 일본 도야마현 도가 예술공원(연극촌) 원형 야외무대에서 공연된 스즈키 컴퍼니 오브 도가(SCOT)의 대표작 ‘세상의 끝에서 안녕’. 이 연극촌을 1976년부터 조성한 세계적인 연출가 스즈키 다다시의 작품이다. [사진 SCOT]

지난 7일 일본 도야마현 도가 예술공원(연극촌) 원형 야외무대에서 공연된 스즈키 컴퍼니 오브 도가(SCOT)의 대표작 ‘세상의 끝에서 안녕’. 이 연극촌을 1976년부터 조성한 세계적인 연출가 스즈키 다다시의 작품이다. [사진 SCOT]

처음부터 국제적인 장소로 커질 거라 예상했단 뜻인가.

“예상했다기보다 꿈꾸긴 했다. 두 가지였다. 국제적인 장소로 만들고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여기선 일본 문화만 소개하는 게 아니라 서로 연극 보고 토론하고 연구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실제 이번 주말에도 한국‧중국‧인도‧폴란드 출신 연극인들이 150명 이상 체류하면서 교류하고 있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모델이라고 자부한다. 또한 작품을 집중적으로 만들기에 좋다. 예를 들어 도쿄에서 한달 걸릴 것을 여기선 2주면 만든다. (합숙이 기반이라) 연습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숙소비가 안 든다. 여기서 만든 작품을 세계 곳곳에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성공했다고 자평한다.“

1976년 도쿄에서 이미 명성을 떨치고 있던 37세 연출가였던 스즈키가 이 궁벽한 산골로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주민 1500명이 살던 도가 마을은 거슬러 올라가면 전투에서 패한 사무라이들이 은거해 살던 곳이었다 한다. 겨울이면 2~3m에 이르는 적설량을 감당하기 위해 뾰족한 맛배지붕, 즉 갓쇼 즈쿠리(경사가 심한 맞배지붕) 양식이 발달했다. 이런 전통가옥에 현대적 개조를 더하니 훌륭한 극장이 됐다. 스즈키 컴퍼니 오브 도가(SCOT) 역사의 시작이다.

세계적인 연극 명소로 떠오른 일본 도야마현 도가 연극촌의 전통 가옥 형태 시설. 겨울에 눈이 2~3m 쌓이는 지역 특성 때문에 갓쇼 즈쿠리(경사가 심한 맞배지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도가=강혜란 기자

세계적인 연극 명소로 떠오른 일본 도야마현 도가 연극촌의 전통 가옥 형태 시설. 겨울에 눈이 2~3m 쌓이는 지역 특성 때문에 갓쇼 즈쿠리(경사가 심한 맞배지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도가=강혜란 기자

일본 도야마(富山)현 난토(南礪)시 도가(利賀)예술공원(연극촌) 주요 시설 안내도. 일본이 배출한 세계적인 연출가 스즈키 다다시가 1976년 해발 800m 산골동네에 조성하기 시작, 현재 6개 상설극장을 둔 세계적인 극예술 명소로 자리잡았다. [그래픽 SCOT]

일본 도야마(富山)현 난토(南礪)시 도가(利賀)예술공원(연극촌) 주요 시설 안내도. 일본이 배출한 세계적인 연출가 스즈키 다다시가 1976년 해발 800m 산골동네에 조성하기 시작, 현재 6개 상설극장을 둔 세계적인 극예술 명소로 자리잡았다. [그래픽 SCOT]

“연극 마을을 만들겠다”는 그의 계획을 처음엔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신흥종교집단 아니냐’ ‘적군파 잔당이 숨어든 것 아니냐’는 의혹도 받았다. “10년쯤 고생한 끝에” 스즈키 메소드가 배우 훈련의 교본으로 이름을 날리고 SCOT와 교류하려는 공연예술인들의 방문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기업인‧정치인들도 앞다퉈 후원에 나섰다. 지금은 6개의 상설극장과 레스토랑 2개, 한 번에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가 갖춰졌다. 도가 마을 주민은 400명으로 줄었지만 수천 명씩 찾는 연극제가 수시로 열리는 덕에 산골에서 보기 힘든 활기가 넘친다.

연극촌이 지역 주민 삶에도 도움 됐을까.

“처음 내가 내려왔을 땐 빈촌이었다. 겨울이 되면 눈이 3m씩 내리는 곳이다. 학교 문제 때문에라도 젊은이들은 이곳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이젠 부모가 좀 떨어진 곳에 자녀들 집을 사줄 수 있게 유복해졌다. 일본 경제가 좋아진 덕분 아니겠나. 노인들만 남아있고 앞으로 얼마나 더 농사가 가능할지 알 수 없다.
1976년에 도쿄 인구가 1170만명이었는데 지금은 1400만명이다. 도시 집중화가 더욱 심해졌다. 나는 젊은이들에게도 매력 있는 연극촌, 라이프스타일로도 도쿄보다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마을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정치권력이나 재력을 키우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지 않나.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일본뿐 아니라 중국‧러시아‧미국에도 많다. 그런 결핍을 느끼는 이들이 모이기에 연극촌이 유지될 수 있다.”

합심하려면 공유하는 목표, 가치가 있어야 한다.

“도시에서 샐러리맨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인생관이다. TV 엔터테이너처럼 되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자 좋은 작품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2년 전엔 방위성 간부 승진을 눈앞에 둔 사람이 우리 극단에 들어왔다. 지금은 기획자로 활동하는데, 어느 날 내 책을 읽고 자기 인생에 대해 다시 공부하고 싶어졌다 하더라. 여기가 그런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도쿄에만 밀집해서 부모들 돈과 힘으로 좋은 학교 들어가고 출세한다. 다른 인생을 공부하고 싶고, 일반적인 일본인과 다른 삶을 꿈꾸는 사람이 여기 모인다.”

이곳의 상주 단원은 20여명. 옛날식 극단처럼 배우가 스태프를 겸한다. 7일 밤 원형 야외극장에서 열린 ‘세상의 끝에서 안녕’ 공연 때도 ‘SCOT’ 단원 셔츠를 입은 배우들이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십시오)”를 연신 외치며 관객들을 안내했다. ‘리어왕’ ‘트로이의 여인들’ 등 SCOT 대표작 주연 배우들도 예외 없다.

시스템이 정착돼야 굴러갈 수 있겠다.

“여기선 예술가가 관리한다. 관료들은 간섭하지 않는다. 도야마현이 시설 소유주이고 증축·보수·관리를 도맡고 있지만 공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우리에게 줬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스코틀랜드’에 사는 사람 같다(SCOT와 땅이라는 의미의 랜드를 합친 말장난).
우리는 연봉제이고 극단원이 쉴 때도 급여가 나온다. 내가 해외 공연에 컨설팅하고 받는 돈도 모두 극단으로 돌아간다. 40년 동안 불만 때문에 퇴단한 사람은 없다. 내 목적은 수익이 아니다.“

일본 도야마현 도가 예술공원(연극촌) 내 인공호수를 배경으로 조성된 원형 야외극장. 건축가 이소자키 아라타(磯崎新)가 연출가 스즈키 다다시의 요청에 따라 설계했다. [사진 SCOT]

일본 도야마현 도가 예술공원(연극촌) 내 인공호수를 배경으로 조성된 원형 야외극장. 건축가 이소자키 아라타(磯崎新)가 연출가 스즈키 다다시의 요청에 따라 설계했다. [사진 SCOT]

도가 연극촌을 모델로 삼으려는 연극인, 지자체 관계자도 끊임없이 방문한다. 그럴 때마다 스즈키는 “이곳의 목적은 연극이 아니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한다. “나는 연극을 통해 사회운동을 하려 했다.”

한국의 이윤택 연출가도 이곳을 본뜬 모델을 시도했지만, ‘미투 사건’이 있었다(스즈키 연출가도 알고 있었다).  

“출발점이 달랐다. 그분은 연극을 잘 해보려 한 것 같은데, 내겐 도쿄 중심으로 편중된 사회가 잘못됐다는 인식이 먼저였다. 그래서 정치인·경제인들부터 설득했다. 나는 순수한 연극인, 혹은 정치와 동떨어진 사람을 믿지 않는다. 연극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정치가와 다른 의미에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지 않나. 나더러 정치하란 권유도 많았지만 거절했다. 내 나름으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한국에서 이 같은 실험을 하려는 이가 있다면.

“연극인 이외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나는 연극을 위해 돈 달라고 한 적 없다. 일본을 변화시키고 싶은 수단으로 연극을 하니 지원해달라 했을 뿐이다. 여기(도가 마을)에 수백억 지원이 들어갔는데 그게 연극을 위해서겠나. 정치인이든 경제인이든 일본을 변화하는 데 찬성하는 분들이 6000명 생겨 우리를 후원한다.”

여든 나이의 노장 연출가는 여전히 활기찼고 ‘사람을 끄는 매력’을 강조했다. 그는 이곳을 잘 운영해온 게 “예술가뿐 아니라 프로듀서로서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며 “프로듀서는 모든 사람들과 잘 어울려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중인격이 필요하다”고 웃었다. 후계 문제에 대해선 “독재만 하지 않으면 일본인이 아니어도 상관없다”면서 “다섯 명 정도가 그룹으로 운영하는 것도 좋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포스트 스즈키 시대의 도가 마을이 지금처럼 활기차게 지속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도가(일본)=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연극올림픽(Theatre Olympics)

 동‧서양 연극인 교류 목적으로 1995년 그리스에서 처음 열렸다. 스즈키 다다시, 로버트 윌슨, 유리 류비모프, 월레 소잉카, 하이너 뮐러 등 세계적인 연출가‧극작가가 주도해 2~3년 주기로 여러 나라에서 개최돼 왔다. 올해는 일본과 러시아 공동 주최다. 도가 마을에서 지난달 23일부터 한달간 세계 16개국에서 모인 27개 팀의 연극 30편이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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