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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마트 종이박스 폐지? 소비자의 분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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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천권필 환경팀 기자

천권필 환경팀 기자

“종이박스야 어차피 마트에서는 무조건 나오는 재활용품이고, 집에 가서 재활용하는 건데 그거까지 막는 건 너무 심하지 않나요?”

대형마트에서 종이박스가 없어진다는 소식에 한 소비자가 인터넷에 올린 댓글이다. 앞서 지난달 29일 환경부와 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농협하나로유통 등은 협약을 맺고 2~3개월의 홍보 기간을 거쳐 매장 안에서 자율 포장대와 종이박스를 없애기로 했다. 포장 테이프와 끈 등 플라스틱 폐기물을 줄이고 장바구니 사용을 독려한다는 취지에서다.

환경부가 대형마트 내 일회용품 줄이기에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4월에는 대형마트와 쇼핑몰 등에서 일회용 비닐봉지 사용을 금지하고 대신 재사용 종량제봉투, 장바구니, 종이봉투 등을 사용하도록 했다. 위반할 때에는 최고 3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기로 했다. 매장 내 속비닐 사용도 점차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환경부의 비닐 규제에 불편을 감수하며 따랐던 소비자들도 이번에는 참지 않았다. 장을 볼 때 크게 불편한 데다가 비닐봉지 금지처럼 환경보호 취지에 부합하는지도 공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당장 종이박스를 없애면 장바구니를 챙겨 오지 않는 소비자들은 돈을 내고 종량제 봉투를 살 수밖에 없다. 소비자의 선택권이 그만큼 줄어드는 셈이다. 종이박스의 경우 재사용되는 종이인 데다가 가정 내 분리 배출도 비교적 잘 되기 때문에 비닐 규제와 다르다는 점을 환경부가 간과한 것이다.

물론, 환경부가 대형마트에서 종이박스와 자율 포장대를 없애려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는 있다. 종이박스를 제대로 분리 배출하면 문제가 없지만, 포장용 테이프를 떼지 않으면 오히려 재활용을 어렵게 할 수 있다. 환경부에 따르면, 롯데마트·이마트·홈플러스 등 3개사에서 연간 사용되는 포장용 테이프와 끈이 658t(톤)에 이른다. 이는 상암구장(9126㎡) 857개를 덮을 수 있는 양이다. 이채은 환경부 자원순환정책과장은 “테이프와 노끈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소비자들이 있다 보니, 종이박스 대신 장바구니를 사용 문화를 확산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번 조치에 대해 환경부 내부에서도 소비자 의견을 무시하고 너무 앞서갔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환경부 관계자는 “나도 장을 보러 가는데 당장 종이박스를 없앤다면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소비자들의 의견 수렴을 거쳐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비난이 쏟아지자 환경부는 2일 설명자료를 내고 “대형마트 빈 종이상자를 당장 없애는 것이 아니다”며 “장바구니 대여 시스템을 만들어 일부 마트에서 적용하는 시범사업을 거쳐 최종 적용 여부를 검토할 예정”이라고 해명했다. 이 과장은 “일부 매장을 대상으로 종이박스 대신 장바구니 대여 시스템을 도입하는 시범사업을 해보고, 소비자들의 불편사항이나 종이박스를 모으는 저소득층에 대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종이박스 폐지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지금이라도 환경부는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는 소비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자율 포장대에서 문제가 되는 포장용 테이프와 노끈만 없애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다. 일회용품 규제는 시민들의 공감과 자발적인 실천 없이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천권필 환경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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