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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팬 케리 마허 교수와 두산 에이스 린드블럼의 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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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리 마허 교수(오른쪽)의 병실을 찾은 두산 투수 린드블럼. 김효경 기자

케리 마허 교수(오른쪽)의 병실을 찾은 두산 투수 린드블럼. 김효경 기자

지난 27일 서울 잠실구장 인근의 한 병원. 두산 베어스 투수 조시 린드블럼(32·미국)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를 반갑게 맞이한 건 ‘사직 할아버지’로 유명한 롯데 팬 케리 마허(65·미국) 교수였다. 린드블럼이 롯데에서 뛰던 시절 우정을 쌓은 두 사람은 반갑게 지낸 이야기들을 풀어놨다. 하지만 내년엔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마허 교수가 한국을 떠나야 하는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마허 교수는 사직구장에서 롯데 선수들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키 1m88㎝, 체중 120㎏의 노교수가 흰 수염을 휘날리며 열정적으로 롯데를 응원하는 모습은 사직구장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김중희(39) 씨는 “하루에 300장 넘게 팬들과 사진을 찍을 때도 있다. 하지만 한 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다”고 했다. 마허 교수는 롯데 구단의 초청을 받아 두 차례 시구자로도 나섰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출신 마허 교수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의 아들이다. 2008년 그는 울산의 한 초등학교에서 원어민 교사로 일하기 위해 한국에 왔고, 2011년부터는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한국에서 홀로 지내던 그에게 최고의 취미는 야구였다. 우연히 학생들과 함께 야구장을 찾은 그는 한국 야구와 롯데의 응원문화에 흠뻑 빠져들었다. 강의 시간을 조정해 지난 5년 동안 한 번도 사직 홈 경기를 빠지지 않고 관전했다.

2017년 준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시구를 했던 마허 교수. [중앙포토]

2017년 준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시구를 했던 마허 교수. [중앙포토]

최근엔 물놀이를 하다 다리를 다쳐 수술을 받았는데, 일부러 잠실구장 인근 병원에 입원했다. 마허 교수의 병간호를 돕고 있는 김윤경(39) 씨는 “결국 휠체어를 타고 롯데 경기를 보러 야구장에 갔다. 교수님의 롯데 사랑은 정말 대단하다”고 웃었다. 김중희 씨는 "야구를 보러 다니는 비용은 모두 본인이 부담하신다. 교수님이 강의를 통해 버는 수익도 많지 않기 때문에 병원비도 주변의 도움을 받았다"고 귀띔했다.

마허 교수는 롯데에 입단한 외국인 선수들의 도우미 역할도 자처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문화적 차이도 극복해야 하는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린드블럼과 친해진 것도 그 때다. 마허 교수는 2015년 롯데에 입단한 린드블럼의 아내와 아이들의 한국 생활을 도왔다. 마허 교수는 “린드블럼이 내게 처음 한 질문은 ‘아침 먹을 만한 식당이 있나요’였다”고 당시를 떠올리며 웃었다. 린드블럼은 “외국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우리 가족과 한국을 찾았던 부모님도 교수님의 큰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린드블럼은 2016시즌 뒤 롯데의 재계약 제안을 거부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막내딸 먼로(3)가 심장병(형성저하성 우심증후군)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먼로의 건강이 좋아졌고, 린드블럼은 2017시즌 후반기 대체선수로 다시 롯데에 돌아왔다. 마허 교수는 “린드블럼이 떠날 때 슬펐지만, 가족을 위한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건강하게 돌아와 정말 기뻤다”고 했다. 린드블럼은 지난해부턴 두산에서 뛰고 있다. 마허 교수는 “두산이 내 두 번째 팀이다. 올해 포스트시즌엔 롯데가 없으니까 두산의 우승을 응원하겠다”고 했다. 다승·평균자책점·탈삼진 1위를 질주중인 린드블럼은 "여전히 내겐 우승이 제일 중요한 목표다. 야구는 팀 스포츠"라고 했다.

올시즌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트리플크라운에 도전하고 있는 린드블럼. [뉴스1]

올시즌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트리플크라운에 도전하고 있는 린드블럼. [뉴스1]

린드블럼이 바쁜 시즌 중에도 마허 교수를 찾아간 건 그의 처지 때문이다. 마허 교수의 나이는 만 65세다. 교육법에 따른 대학교수 정년이 65세다. 9월 30일까지 직업을 찾지 않으면 비자가 만료돼 2주 안에 한국을 떠나야 한다. 당장은 다리 치료 때문에 체류기간을 연장할 수 있지만 새 직장을 찾지 못하면 장기 체류할 수 없다. 조현호(50) 씨는 "몸이 불편해서 최근엔 면접을 보러 가지 못했다"고 전했다.

마허 교수는 “65세지만 나는 여전히 열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친다”며 “11년 동안 살아온 한국을 떠나 롯데와 한국 야구, 그리고 KBO 프렌즈(한국에서 만난 이들을 그렇게 불렀다)를 볼 수 없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라고 했다. 린드블럼은 “롯데의 상징은 열광적인 팬이고, 교수님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교수님을 잃는다는 건 롯데 뿐 아니라 한국 야구에도 안타까울 것”이라고 했다.

마허 교수의 상황을 걱정해 일부 팬들은 모금 운동도 고려하고 있다. 부산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벤자민하(58) 씨를 중심으로 밴드 '케리 포에버'를 통해 진행할 계획이다. 마허 교수는 “작은 초등학교, 대학, 어디든 관계없다. 일을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야구를 볼 수 있다면 행복하다”고 말했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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