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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보수건 진보건 불의는 불의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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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호 31면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나쁜 것은 힘들이지 않고 무더기로 얻을 수 있다네/길은 평탄하고 가까이 있기 때문이라네/그러나 미덕 앞에는 신들이 땀을 가져다 놓으셨지”

법의 문제도 좌우 대립도 아닌 #기득권층의 모럴 해저드 문제 #조국 구하려다 진보에 치명타 #거짓 만드는 게 나여서는 안 돼

고대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의 노동시 『일과 날』의 한 구절이다. 플라톤의 형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 앞에서 이 부분을 읊는다. 그는 이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구절도 꺼내 든다.

“죄를 짓거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제물을 바치는 구수한 냄새로 신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것이오.”

이런 결론을 내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불의(不義)를 행한 뒤, 그것을 해서 얻은 소득으로 제물을 바치는 게 상책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올바르다면 불의로 얻는 이득을 놓칠 것이고, 불의하더라도 탄원하면 신의 마음을 움직여 벌을 받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요.”

온 세상 시끄럽게 만드는 법무장관 후보자가 사는 법 이야기에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이 대화를 떠올렸다. 그가 아데이만토스가 말하는 ‘불의의 행복’을 기꺼이 누리며 사는 듯해서다. 소송을 하고, 부채를 갚고, 주소를 옮기고, 아파트를 사고팔며, 자녀를 진학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힘들이지 않고 얻은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오죽하면 화제가 됐던 드라마 ‘SKY 캐슬’의 주인공들은 (어지간한 중산층이 보기에도 딴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같았음에도) “능력도 안 되면서 자녀를 의대에 보내려고 몸부림치는 서민들”이었다는 우스개가 등장할까. 후보자의 경우 간절히 바라기만 하면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온 우주’가 나서 도와주는데 말이다.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지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지 물으라”는 케네디 명언이 지금 이 땅에서 리바이벌되는 게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의 빚 갚기 신공을 생각하면, 한때 꼬리를 물었던 ‘빚투’에 시달리던 연예인들은 땅을 칠 일이다.

물론 그의 주장처럼 불법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불의와 불법은 다른 말이다. 법에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란 말이다. 현직 교수인 그가 어떤 학문적 성취를 이뤘는지는 모르나, 그의 말을 들으면 그가 법을 전공한 이유가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절차적 불법이 없었다는 점을 내세우지 않고 국민의 질책을 받겠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말하며 나 몰라라 하지 않을 것이다.”

선데이칼럼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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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겠다면서 불법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어법이다. 교묘하기는 하지만 영리해 보이지는 않는, 그래서 더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조국 화법’이다.

이 문제는 법의 문제가 아니다. 기득권층의 모럴 해저드와 특권 남용의 문제다. 그러면서 자신은 고결한 척, 다른 기득권층의 잘못을 꾸짖던 그의 ‘오럴 해저드’와 그에 대한 국민적 배신감의 문제인 것이다. 그가 지금까지 비난했던 것들이 모두 불법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도 드러난 불의가 마치 자신은 “법과 제도 개혁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에 챙길 수 없었던 가족들의 불찰로 모는 듯한 ‘인지 부조화’의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는 그가 여전히 기대려고 하는 듯한 보수 대 진보의 문제도 아니다. 여기저기서 그를 두남두는 절망적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부정입시 의혹을 “자녀의 사생활”로 표현하는 정신 나간 비서관이 있는가 하면, “나보다 조국을 더 잘 아는 대통령이 지명했으니 무조건 지지한다”는 놀라운 세계관의 작가도 있다. “사법개혁이 그렇게 무서우냐”고 묻는 댓글도 넘친다.

제발 좀 이성을 찾자. 보수건 진보건 불의는 불의다. 이 문제를 보수 대 진보의 갈등으로 몰아간다면, 불의한 후보자는 살릴 수는 있을지 몰라도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지만) 결국 진보를 망치게 될 뿐이다. 건전한 진보세력에 흠집이 생기면 결국 그것은 국가를 망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사법개혁을 위해서라도 그러면 안 된다. 후보자가 그것만 보고 걸어왔다던 사법개혁이란 곧 불의가 뿌리내릴 자리를 주지 않도록 법망을 정비한다는 뜻 아닌가. 그런 개혁을 어떻게 불의의 행복을 즐기던 사람이 수행할 수 있겠나 말이다. 그가 그토록 인사 검증을 못 하던 미스터리가 이번에 밝혀지지 않았나 말이다. 국민을 경악시켰던 모든 후보자가 자신보다 못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잖아도 ‘강남좌파’로 조롱받던 그는 “강남좌파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바로 그가 스스로 강남좌파들이 설 땅을 더욱 좁게 만들었다는 말이 보다 설득력 있게 들린다. 캐비어를 먹고 샴페인을 마시며 평등을 외칠 순 있지만, 그 캐비어와 샴페인은 불의하지 않게 번 돈으로 산 것이어야 한다. 불의한 점이 있었다면 아데이만토스처럼 신에게 사죄해야지 남 탓만 해서는 안 된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말이 그것이다. 위선적인 러시아 정교회 주교들한테 보낸 편지에서 한 말이다.

“당신은 인생을 고결하게 살겠다고 결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당신의 신조로 삼아라. 세상에 거짓이 존재해도 놔두라. 거짓이 승리하더라도 그대로 두라. 다만 나를 통해서 그렇게 되도록 하지는 말라.”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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