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대기업 R&D 부담 줄인다…‘脫일본’ R&D 제도 개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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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연구·개발(R&D)사업에 참여하는 대기업의 출연금을 대폭 완화하는 등 R&D 제도를 개선한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산업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이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8일 소재·부품 분야 11개 주요 공공연구기관과 간담회를 개최하고 이같은 내용의 제도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지난 5일 관계부처가 합동으로 발표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대책’을 구체화한 것이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8일 오후 대전 유성구 화학연구원에서 열린 대외의존형 산업구조를 탈피하기 위한 공공연구기관 간담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뉴시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8일 오후 대전 유성구 화학연구원에서 열린 대외의존형 산업구조를 탈피하기 위한 공공연구기관 간담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뉴시스]

대기업 출연금 부담 절반 낮추고, 중소기업 협력 시 인센티브

정부는 먼저 대기업이 정부 R&D 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출 계획이다. 현행 출연금 및 민간부담현금 제도에 따르면 대기업이 정부의 R&D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총사업비의 67%(현금비율 40%)를 부담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 제도 개선안에 따르면 이 비율은 기존의 절반 이하인 33%(현금비율 13%)까지 낮아진다. 대기업 부담금이 줄어드는 만큼 정부 출연금 지원이 늘어나는 식이다.

또 수요기업(대기업)과 공급기업(중소기업) 협력모델에 대해서도 지원을 강화하기로 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공동 개발한 소재·부품을 구매할 시에는 기술료가 감면된다. 또 중소기업과 기술로드맵을 공유하는 대기업은 가점을 부여해 과제를 우선 지원하는 등 인센티브를 부여하기로 했다. 박건수 산업부 산업혁신성장 실장은 “그간 관리 지향적으로 운영돼 보수적이었던 R&D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며 “기존에 소극적이었던 대기업을 비롯해 기업의 참여를 끌어내고자 한다”고 밝혔다.

5일 정부가 일본 수출 규제에 맞서 소재ㆍ부품ㆍ장비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핵심은 '기업 간 협력 모델 구축'이다. [뉴시스]

5일 정부가 일본 수출 규제에 맞서 소재ㆍ부품ㆍ장비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핵심은 '기업 간 협력 모델 구축'이다. [뉴시스]

핵심기술을 조기에 확보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국내·외 선진화 기술도 보다 적극적으로 도입하도록 했다. 국내 미보유 해외기술을 들여올 시 총 사업비의 50%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국내 기술을 새로이 발굴, 도입할 경우에는 30%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또 국가적으로 시급하게 기술을 개발해야 할 경우, 연구개발 수행 기관을 미리 지정해 추진하는 ‘정책지정’ 방식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과제를 비공개로 진행할 수 있도록 국가과학정보시스템(NTIS)상 근거도 마련했다.

1과제 多기업 추진 허용…“공익성 커 담합 아냐”

복수의 수행기관이 하나의 기술개발을 동시에 추진하는 ‘중복과제 방식’도 허용된다. 산업부 관계자는 “평가위원회에서 그간 지나치게 엄격하게 유사·중복 잣대를 적용해왔다”며 “기술·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공정거래위원회 역시 7일 신기술 R&D 추진 시 기업 간 공동행위를 인정해주는 ‘공동행위 인가제도’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간 기업 간 공동행위는 담합으로 취급돼 엄격히 금지됐지만 &D의 경우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성격이 강해 이로 인해 소비자 편익이 줄어들 가능성이 적다는 게 공정위의 판단이다.

또 도전적인 R&D를 장려하기 위해 목표달성에 실패해도 정부 지원에서 배제하지 않는 방안도 추진한다. 기존에는 과제수행 실패 시 ‘성실수행’과 ‘불성실수행’으로 등급을 나눴다. 과제를 성실히 수행했다고 평가되더라도, 2회 이상 누적되면 3년간 정부 R&D 지원에서 제외됐다. 정부는 이번 제도 개선을 통해 해당 제도를 폐지한다는 방침이다.

7년간 7조원 투자한다는 정부, 19년간 5조 4000억원 ‘R&D 소홀’

한편 이번 개선안이 기존 발표됐던 R&D 혁신방안과 중복되는 등 정부가 R&D 분야에 전반적으로 소홀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지난해 ‘국가기술혁신체계 고도화를 위한 국가 R&D 혁신방안’을 확정하는 등 과학기술 정책 혁신에 공을 들여온 문재인 정부 역시 전체 예산 증가율의 약 3분의 1 수준만 R&D 예산에 반영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실제로 2017년~2019년 연평균 예산 증가율은 8.3%였지만, R&D 예산은 같은 기간 2.6%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또 5일 정부가 향후 소재·부품 분야에 7년간 7조원 이상을 투자하겠다고 했지만, 2001년 이후 19년간 투자된 예산은 5조 4000억원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영무 전(前) 한양대 총장은 “외교적으로 일본과의 관계가 진전된다 하더라도 정책이 꾸준히 유지돼야 산업경쟁력이 성장한다”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신뢰성 없는 제도로는 전문성을 키우기 어렵다”고 밝혔다.

세종=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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