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항 크레인 '폭삭'은 과학에 무지한 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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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6면

태풍 '매미'가 영남과 강원 지방을 매섭게 할퀴고 지나갔다.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며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봤다. '천재(天災)'인가, '인재(人災)'인가 하는 논란은 올해 역시 빠지지 않았다.

대형사고와 재난을 보다 효율적으로 예방하고 대처할 수 있는 재난구조시스템이 여전히 아쉽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재난구조 분야의 기초과학 지원을 서둘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더 이상 '주먹구구식' 행정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과학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편집자>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조원철 교수는 최근 태풍 '매미'의 수해현장을 둘러본 뒤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4백억원이 넘는 부산항 컨테이너 크레인이 무너진 현장에선 특히 그랬다. 현재 당국이 정밀한 원인 파악에 들어간 상태지만 조교수는 "물리에 대한 몰이해가 화를 자초했다"고 분석했다.

크레인을 두개씩 짝을 지어 세워놓다보니 바람의 영향을 계산치 이상으로 받았다는 것이다. 간격을 띄워놓고 세웠을 경우 바람의 세기를 1백 정도 지탱할 수 있지만 덩치 큰 크레인 두개가 몰려 있을 경우 견딜 수 있는 바람의 세기는 이보다 크게 떨어진다. 따라서 설치기준에 맞게 시공했더라도 초강력 태풍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조교수의 설명이다. 무게가 야구공(약 2백30g)의 두배에 달하고 부피가 큰 축구공(약 4백50g)이 바람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원리다.

재난에 대한 예상.대응.복구 과정에 과학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매번 '주먹구구식'으로 대처하다보니 그동안의 재난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데이터와 노하우가 부족하고, 전문가 또한 양성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재난에 대비할 수 있는 연구개발 능력없이는 중장기 방재기본계획도 형식에 그칠 것이란 우려 섞인 목소리도 적지 않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상이변으로 갈수록 세차지는 자연재해를 예상조차 하기 힘든 실정이다. '혼돈이론과 복잡성의 과학'을 접목해 기후변화를 예측하고 시설물의 설치기준을 강화해나가는 선진국과 비교해 재난대처 수준 격차는 더욱 벌어질 전망이다.

우리나라의 재난관련 연구개발 능력의 현주소를 말해 주는 곳이 행정자치부 산하 국립방재연구소다. 연구개발비는 연간 15억원 수준으로 국립연구소 가운데 최하위권이다. 1997년 설립 이후 박사급 연구인력은 8명선에 그치고 있다. 1년에 1천억~2천억원을 연구개발비로 사용하고 박사급 연구인력 30여명을 보유하고 있는 일본 도시방재연구소에 비하면 일개 부서 수준인 셈이다.

국립방재연구소 백민호 박사는 "재해가 닥칠 때마다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이는 일본의 재난관리 시스템 이면에는 1백년에 한번 올까말까한 위험도 가정하는 연구개발 노력이 숨어있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 도시방재학회.소방학회 등에서 활동 중인 학자는 대략 1백여명. 이중 50여명이 재난현장을 누비며 연구개발에 몰두하고 있지만 후학양성은 힘든 현실이라고 백박사는 덧붙였다.

자연재해뿐 아니라 대구지하철 참사와 같은 대형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현장에도 과학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아쉬움이다. 서울대 화재안전공학센터 김원국 연구교수는 최근 5층 건물의 지하 1층 창고를 대상으로 화재에 따른 인명 안전성 평가를 실시했다. 지하 1층은 7천5백㎡ 넓이로 1백60명이 근무하는 곳으로 스프링클러의 개수나 위치, 수량(水量) 등이 모두 소방법에 맞춰 설치됐다.

탈출구의 위치와 피난시간 등을 모두 입력한 뒤 미국 표준기술연구소(NIST)에서 무료 배포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돌려본 결과 끔찍한 결과를 얻었다. 스프링클러가 화재를 억제하긴 했지만 완전 진화는 성공못해 32명이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스프링클러 등의 설치기준을 대략적인 평균치에 꿰어맞춘 결과"라며 "정량분석에 기초한 화재 안전성 평가를 시급히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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