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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시시각각

반일 프레임의 달콤한 유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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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 논설위원

김동호 논설위원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경쟁 세력을 비방하고 공격하는 도구로 빨갱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다.” 줄곧 일본에 대해 강경 발언의 수위를 높여 온 문재인 대통령의 올해 3·1절 100주년 기념사 대목이다. 이후에도 청와대의 반일(反日) 강경 발언은 꼬리를 물었다. “(과거사를) 일본이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부분이 아주 아쉽다.”(사회원로간담회) “한국의 일부 정치인과 언론이 일본 정부에 동조하며 한국 정부와 법원을 비방하고 있다.”(조국 전 민정수석)

해방과 함께 모든 친일파 사라져 #미들파워 된 한국의 포용력 필요 #절제된 자세로 미래를 내다보자

이런 발언이 우리가 직면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지는 차치하고 얼마나 보편타당한지 의문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청와대의 강경책을 비판하거나 우려하면 무조건 ‘친일파’로 낙인 찍힌다.

말을 한 번 바꿔보자.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경쟁 세력을 비방하고 공격하는 도구로 친일파란 말이 사용되고 있다.” ‘빨갱이’를 빼고 ‘친일파’를 넣었더니 어떤가. 완벽한 문장이 됐다. 오히려 이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지금 한국에선 정부 정책에 반대 목소리를 내면 친일파란 꼬리표가 붙는다. 나아가 이런 반일몰이를 위해서는 ‘토착왜구’라는 1세기 전 신조어까지 동원된다.

어원은 19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매일신보에 ‘토왜(土倭)’가 처음 등장했고 2년 뒤 ‘시사단평’ 코너에 ‘토왜천지(土倭天地)’라는 글이 실렸다. 여기서 토왜는 ‘얼굴은 한국인이나 창자는 왜놈인 도깨비 같은 자’로 정의됐다. 토왜의 구체적 행태는 이렇게 요약된다. ‘첫째 뜬구름 같은 영화를 얻고자 일본과 이런저런 조약을 체결하고 그 틈에서 몰래 사익을 얻는 자. 둘째 암암리에 흉계를 숨기고 터무니없는 말로 일본을 위해 선동하는 자. 셋째 일본군에 의지해 지방에 출몰하며 남의 재산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자. 넷째 저들의 왜구 짓에 대해 원망하는 기색을 드러내면 온갖 거짓말을 날조해 사람들의 마음에 독을 퍼뜨리는 자.’

이 용어가 등장하면서 조금이라도 문 정부에 고개를 들면 바로 토착왜구 세례가 날아든다. ‘친일파=토착왜구’라는 휘발성 프레임의 위력이다. 이렇게 친일파라고 몰아붙이면 일본을 혼내주는 것 같아서 속 시원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21세기 대명천지 어디에 친일파가 있다는 건가. 발상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우리는 한·일 양국 1000만 명이 교류하는 21세기에 살고 있다. 일부 젊은이들은 달콤한 일본 케이크를 쫓아다니고 막걸리보다 사케를 더 꿰고 있다. 이들도 토착왜구인가. 100년 전처럼 일본에 달라붙어 덕 볼 일이라도 있다고 보는가.

원죄(原罪)를 가진 일본이 자숙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당장 일본은 치졸한 경제보복을 중단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도 자중해야 한다. 2015년 정부 간 합의로 출범한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하고, 한·일 청구권협정을 문제 삼은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로 최근 갈등을 증폭한 건 한국 쪽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반일 바람이 불면서 문 대통령 지지율은 치솟고 있다. 반(反)시장·반기업 정책실험으로 민간경제는 2년 만에 쑥대밭이 됐고, 한국 영공이 중·러의 놀이터로 유린 당해도 정부는 반일로 재미를 보고 있어서인지 의례적 경고 성명조차 내지 않았다. 내부의 ‘반일 전쟁’에 취해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는 분위기다. 반일 프레임의 달콤한 유혹이 얼마나 위험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일찌감치 진보 성향의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이런 반일 선동을 관제 민족주의라고 우려한 이유 아니겠나.

한국은 1세기 전 약소국이 아니다. 강대국은 아니지만 수출 6위·경제 규모 12위의 엄연한 ‘미들 파워’ 국가다. 당당히 포용력을 발휘할 때가 됐다. 해방과 함께 사라진 친일파는 물론 친중파·친미파라는 말도 의미 없다. 이런 말장난을 언제까지 우려먹을 건가. 이제는 반일의 덫에서 벗어나야 한다. 절제된 대응으로 미래를 내다보자. 보름 앞으로 다가온 광복절에는 제발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를 지향하는 대통령 기념사가 나오길 바란다.

김동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