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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졌잘싸’로 끝내지 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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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혜수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장혜수 스포츠팀 차장

장혜수 스포츠팀 차장

강귀녀. 혹시 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중국은 여자축구를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밀어 넣었다. 당시 중국은 여자축구 세계 최강이었다. 북한·일본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한국 여자축구는 유명무실하던 시절이다. 그래도 중국·일본에 북한까지 출전하는 마당에 빠진다는 건 한국으로선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문제였다.

정부 지시로 대한축구협회가 여자대표팀을 꾸렸다. 공개 테스트로 대표선수 18명을 뽑았다. 그중엔 하키선수(임은주)도, 펜싱선수(이명화)도 있었다. 여자대표팀은 아시안게임 개막 20여일 전 사상 첫 국제경기(1990년 9월 6일)를 치렀다. 상대는 일본. 결과는 1-13 참패였다. 그나마 사상 첫 골(후반 22분 페널티킥)이 위안거리였다. 강귀녀는 이 골의 주인공이다. 그는 고향(전북 익산)에서 부모님과 농사일을 하던 조기축구회 출신이다. 여자대표팀은 사흘 뒤(9일) 두 번째 평가전에서 일본을 한 자릿수 실점(0-5)으로 막았다. 아시안게임에선 북한에 0-7, 일본에 1-8, 대만에 0-7, 중국에 0-8로 크게 졌지만, 홍콩을 1-0으로 꺾고 국제경기 첫 승을 거뒀다.

2018 평창 겨울올림픽에 남북단일팀으로 출전한 여자 아이스하키처럼, 그때 여자축구가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로 끝났다면 오늘은 없었을 것이다. 수모를 잊지 않고 꾸준히 성장해, 중국을(2001년 8월7일 토토컵 3-1), 일본을(2003년 6월 21일 AFC선수권 1-0), 북한을(2005년 8월 4일 동아시안컵 1-0) 차례로 꺾었다. 급기야 2010년 국제축구연맹(FIFA) 17세 이하(U-17) 여자월드컵에서 세계 정상에도 섰다.

2019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의 한국 여자수구는 30년 전 여자축구의 데자뷔다. 국제경기 데뷔전인 14일 헝가리전에서 세계선수권 사상 최다점수 차인 0-64로 졌다. 선수들은 “(실점을) 50점 이내로 막자”며 이를 악물었다. 16일 러시아에 30점만 내줬다. 게다가 경다슬이 한국 여자수구 사상 첫 골을 터뜨렸다. 선수들은 얼마 전까지 수구의 ‘구’자도 몰랐던 경영 종목 출신이다. 막 발걸음을 내디딘 여자수구, 여자 아이스하키와 여자축구 중 어느 길을 가게 될까.

장혜수 스포츠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