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급 포기했으면 입어"…반바지 출근, 일상 될까?

중앙일보

입력

8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청 로비에서 열린 '즐거운 반바지 패션쇼' 모습 [사진 수원시청]

8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청 로비에서 열린 '즐거운 반바지 패션쇼' 모습 [사진 수원시청]

“진급 포기했으면 입어도 돼!”

대기업 입사 5년 차인 이모(32)씨는 올여름 반바지를 입을 수 있을지 회사 선배에게 물어봤다가 이런 답변을 받았다. 이씨가 다니는 회사는 규정상 반바지를 허용하고 있지만 아무도 입지 않는다고 한다. 이씨는 “얼마 전 부장이 출퇴근 반바지 착용 관련 논란을 보고 ‘저건 좀 아니지 않냐’고 말하는 걸 보고 올해도 반바지는 포기했다”고 말했다.

체육 교사로 일하고 있는 박모(37)씨는 용기를 내 반바지를 입고 출근했다가 ‘호출’을 당했다. 이 학교 교감은 박씨에게 “엄연한 직장인데 너무 편하게 다닐 생각 하지 말라”고 나무랐다. 이후 박 씨는 교장실까지 가서 반바지를 입고 온 이유에 대해 해명해야 했다고 한다.

반바지 전도 나선 공공기관

최근 경기도청과 경남 창원시 등이 ‘반바지 논란’에 불을 지폈다. 경기도는 1일부터 남자직원의 여름철 반바지 착용을 허가했다. 시행에 앞서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참여한 도민의 80.7%, 직원의 79%가 반바지 착용을 찬성했다고 한다.

창원시도 3일 시장이 직접 반바지 차림으로 출근해 시선을 끌었다. 창원시는 7~8월 매주 수요일을 ‘프리 패션 데이’로 정했다. 이날 직원들은 반바지를 포함해 자율 복장으로 출근할 수 있다. 수원시는 8일 ‘즐거운 반바지 패션쇼’를 열어 반바지 복장 정착을 독려하기도 했다.

경기도청 반바지 자율 착용 시행 첫날, 반바지를 착용하고 출근한 구자필 주무관. [경기도 제공=연합뉴스]

경기도청 반바지 자율 착용 시행 첫날, 반바지를 착용하고 출근한 구자필 주무관. [경기도 제공=연합뉴스]

현실에서 반바지는 판타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반바지 착용은 이상적인 구상일 뿐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삼성전자ㆍ현대자동차ㆍSK하이닉스 같은 민간기업들은 원칙적으로는 임직원에게 반바지 착용을 허용했지만, 참여율은 저조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해당 기업 중 한 곳에 다니는 양모(34)씨는 “반바지는커녕 화려한 무늬의 셔츠를 입었다가 선배에게 지적받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점심시간에 가까운 옷가게에서 면 셔츠를 사 갈아입어야 했다.

서울시청에 근무하는 A씨(31)는 “보수적인 공무원 분위기도 있고 민원인 등 다른 사람 눈도 있으니 반바지 착용은 웬만한 용기로는 어렵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2012년부터 매년 6∼8월 반바지와 샌들 차림을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12일 오전 지하철 1호선 시청역은 출근하는 직장인으로 붐볐지만, 이들 중 반바지를 입은 남성이 시청사로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업무와 관련 없어 vs 의복 예절도 문화 

시민 반응은 나뉘었다. 비교적 복장이 자유로운 회사에 다닌다고 밝힌 이준현씨는 “슬리퍼에 가까운 모양의 신발을 신고 출근하는 동료도 있다”며 “출근 복장이 업무에 나쁜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면 문제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공무원 준비생 김모(24)씨는 “반바지 입은 여성을 부러워하는 남성 공무원을 많이 봤다”며 “공공기관은 실내온도를 28도로 유지하라고 하는데 반바지를 입으면 에너지도 절약되고 더위로 저하되는 업무 효율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신분당선 판교역에서 판교테크노밸리로 가는 길에 있는 봇들저류지공원 앞 횡단보도에서 판교 직장인들이 출근하고 있다. 대학 캠퍼스처럼 대부분 캐주얼 복장차림이며 반바지를 입은 이들도 많다. 박민제 기자

신분당선 판교역에서 판교테크노밸리로 가는 길에 있는 봇들저류지공원 앞 횡단보도에서 판교 직장인들이 출근하고 있다. 대학 캠퍼스처럼 대부분 캐주얼 복장차림이며 반바지를 입은 이들도 많다. 박민제 기자

반면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있었다. 다수의 사람이 아직 반바지를 격식 없는 것으로 인식한다면, 직장에선 예의 갖춘 옷을 입는 게 좋다는 것이다.

서울 동대문으로 출근한다는 김모(29)씨는 “반바지 차림을 보기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밀어붙인다고 될 일은 아니다”며 “의복 예절도 하나의 문화인 만큼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0년 넘게 직장생활을 했다는 이모(54) 씨는 “복장은 때와 장소에 맞게 입어야 한다”며 “통풍이 잘되게 한 소재의 긴바지 등 대안이 있는 만큼 굳이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옷은 입지 않는 편이 좋다”고 주장했다.

이태윤 기자 lee.tae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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