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창고같은 회의실 불러 "내달 화이트국서 韓 배제" 일방통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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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현 산업통상자원부 무역정책관이 12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한·일 양자 실무협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뉴스1]

이호현 산업통상자원부 무역정책관이 12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한·일 양자 실무협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뉴스1]

'평행선'만 확인했다. 경제보복 조치를 두고 한ㆍ일 정부가 처음 마주 앉은 자리에선 예상대로 실질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우리 정부는 “만난 데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지만, 앞으로 험로(險路)를 예견하는 듯한 대면식이었다.

이호현 산업통상자원부 무역정책관은 12일 “일본은 수출 통제 조치는 협의 대상이 아니란 입장을 반복했다”며 “우리 정부는 ‘해당 조치를 내린 근거가 추상적이며, 사전합의도 없이 전격적으로 조치한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ㆍ일 실무회의 직후 정부서울청사에서 가진 브리핑에서다. 오후 2시 시작한 실무회의는 오후 7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이 정책관에 따르면 일본 측은 오늘 회의 성격에 대해 “한국 요청에 따른 설명회이자 사실 확인을 위한 자리지 이번 조치는 협의 대상이 아니다”라며 “언론 등에 공개한 내용에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아 조치의 취지와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자리”라고 전제했다.

일본 측이 설명하고자 한 수출 통제의 취지는 무엇일까. 요약하자면 책임이 한국에 있다는 것이다. 일본 측은 “국제 통제 체제 이행을 위해 한국에 개선 요청을 했지만, 재래식 무기에 대한 ‘캐치올(catch allㆍ무기로 전용할 가능성이 있는 전략물자를 무기 제조 가능성이 있는 국가에 수출할 수 없도록 통제하는 제도)’ 규제를 도입하지 않았고, 최근 3년간 양자 협의가 이뤄지지 않아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 국가에서 제외했다”고 주장했다.

일본 측은 또 “불화수소 등 3개 품목은 국제수출 통제 체제의 규제 대상으로써 공급국의 책임에 따른 적절한 수출관리의 필요성, 한국 측의 짧은 납기 요청에 따른 수출관리 미흡, 일본에서 한국으로 가는 수출과 관련한 부적절한 사안 등이 발생해 유사 사례를 미연에 막기 위해 3개 품목에 대해 조치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측이 ‘부적절한 사안’에 대한 질의했지만 일본 측은 명확한 답변을 내지 않았다. 일본 측은 “일부 언론에 나온 것과 같이 달리 북한을 비롯한 제3국으로 수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지만, 일본에서 한국으로 가는 수출에서 법령 준수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수출 금지’가 아니란 점도 강조했다. 일본 측은 “국제통제 체제에 따라 개별적으로 심사해 일본이 수출하는 내용을 적절하게 운영하기 위한 것이지, 수출 금지 조치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최종적으로 순수한 민간용도 품목이라면 무역 제한의 대상이 아니며, 다소 시간이 걸릴 수는 있지만 허가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향후 일정에 대해 일본 측은 “리스트 규제는 7월 4일부터 이미 시행하고 있다”며 “화이트 리스트 제외는 7월 24일까지 의견수렴을 거쳐 각의 결정 후 공포하고, 그로부터 21일이 지나간 날로부터 시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12일 일본 도쿄 경제산업성 별관 사무실에서 열린 한일 양국 첫 실무회의에서 산업통상자원부 전찬수 무역안보과장, 한철희 동북아통상과장이 일본 측 대표인 이가리 가쓰로(猪狩克郞) 안전보장무역관리과장, 이와마쓰 준(岩松潤) 무역관리과장(오른쪽부터 시계 반대방향)과 마주 앉아 있다. [연합뉴스]

12일 일본 도쿄 경제산업성 별관 사무실에서 열린 한일 양국 첫 실무회의에서 산업통상자원부 전찬수 무역안보과장, 한철희 동북아통상과장이 일본 측 대표인 이가리 가쓰로(猪狩克郞) 안전보장무역관리과장, 이와마쓰 준(岩松潤) 무역관리과장(오른쪽부터 시계 반대방향)과 마주 앉아 있다. [연합뉴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일본의 조치가 정당하지 않다는 점을 부각하는 데 집중했다. 이 정책관은 “이번 조치가 전 세계 밸류 체인(가치 사슬)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안이라는 데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명했다”며 “아베 총리가 ‘강제 징용과 관련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무역 관리를 신뢰할 수 없다’고 한 데 대한 경제산업성의 입장 확인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화이트 리스트 제외에 대한 일본 측 주장에 대해선 “그동안 캐치올 의제에 대한 일본 측 요청이 없었다”며 “한국의 캐치올 통제는 일본 측 주장과 달리 방산물자 등 대량살상무기와 재래식 무기에 대해서도 작동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전략물자 관리도 산업부를 비롯해 전략물자 관리원, 원자력안전위원회, 방위사업청 등 100여 명의 인력이 담당하는 등 일본보다 강력하게 시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3개 품목에 대한 수출 통제 강화에 대해선 “일본 측 사유가 매우 추상적이며, 사전합의 없이 불과 3일 만에 전격적으로 조치를 취한 것은 정당하지 않은 조치”라고 지적했다. 이어 “일본 측이 책임 있게 심사 기간을 단축해 달라”고 요청했다.

양국 간 협의회 개최에 대해선 “이미 올해 3월 이후 협의회를 개최키로 양국 간 합의했다”며 “협의 중단 의사가 없는 만큼 조속한 협의를 재개해 달라”고 주문했다. 구체적으로 “7월 24일 이전에 양국 수출 통제 당국자 간 회의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한국 측 주장에 대해 일본 측은 “금일 협의 목적은 이번 조치에 대한 사실관계 설명”이라고 반복하며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실무회의 분위기는 차가웠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청사 10층 작은 사무실을 회의 장소로 잡았다. 정식 회의실이 아니라 일반 사무용 의자가 놓여있었다. 회의 참석자를 위한 명패나 음료수도 없었다. 화이트보드에 ‘수출관리에 관한 사무적 설명회’란 글자를 인쇄한 용지 2장만 붙여놨다. 양복을 재킷까지 갖춰 입은 한국 측과 달리 일본 측은 반소매 셔츠 차림이었다. 의전이 외교의 일부인 만큼 ‘냉대’한다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했다.

한국에선 산업부 전찬수 무역안보과장과 한철희 동북아통상과장, 일본에선 경제산업성 이와마쓰 준(岩松潤) 무역관리과장과 이가리 가쓰로(猪狩克郞) 안전보장무역관리과장이 참석했다. ‘호스트’인 일본 측은 한국 측에 악수를 권하지도, 명함을 내밀지도 않았다. 한국 측 대표단이 입장할 땐 자리에 앉은 채 정면만 바라봤다.

앞서 한국 정부는 양자 협의 대표를 국장급 이상으로 하자고 일본 측에 요청했다. 고위급이 직접 나서 속전속결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셈법이었다. 하지만 일본 측은 즉답을 피하다 실무진인 ‘과장급’ 협의를 하자며 격을 낮췄다. 양측 대표단 규모도 우리 측이 요구한 각 5명에서 각 2명으로 줄였다. 그러면서 공식 협의가 아닌 ‘설명회’로 만남의 성격을 규정했다. 협의가 아닌 만큼 한국 측 요구를 듣지 않고 일본 측 입장을 설명하겠다는 취지다. 여러모로 일본 측의 ‘기선잡기’로 해석됐다.

정부는 이번 양자협의를 국장급 이상 고위급 협의로 가는 ‘지렛대’로 삼을 계획이다. 일본이 양자협의를 설명회로 깎아내린 것과 별개로 ‘기록’이 남는다는 점도 이득이다. 비록 실무진급이지만 이번 협의가 한국 측이 사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지속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향후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단계로 가게 되면 이번 양자협상이 WTO 분쟁해결 절차 첫 단계인 양자협의 과정의 비공식 첫 협상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종=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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