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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사서 포장 뜯는 걸 왜 보냐고? 정보 얻고 대리만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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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3호 02면

‘언박싱 영상’ 열풍의 사회심리학

유튜브에서는 장바구니 내용까지 공유된다. 캡처 속 유튜버는 왼쪽 상단부터 ‘ㄹ’자 순서로 세은·다예·에바·MR·웃소·트위티·츄삐·치유·흐림·제이미 추아·소울·카민·한별·김습습·박막례·써니.

유튜브에서는 장바구니 내용까지 공유된다. 캡처 속 유튜버는 왼쪽 상단부터 ‘ㄹ’자 순서로 세은·다예·에바·MR·웃소·트위티·츄삐·치유·흐림·제이미 추아·소울·카민·한별·김습습·박막례·써니.

대학생 김신혜(24)씨는 매일 두 시간 정도 유튜브를 본다. 보는 영상 10개 중 3~4개는 ‘언박싱·하울’ 영상이다. 그는 “유튜버들이 좋아하는 물건을 대신 사서 포장을 벗기는 것을 보면 같이 설레는데 그 느낌이 좋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70대 유튜브 크리에이터 ‘박막례 할머니’가 올린 ‘반찬거리 잔뜩 사온 거 구경해요’라는 영상(올 2월 18일 게재)을 봤다. 박막례 크리에이터는 영상에서 동치미에 들어갈 배나 고추, 총각무를 사왔다고 자랑하고, 귤이나 코다리도 보여준다. 김씨는 얼마 전에 물김치를 담가서인지 영상을 틀자마자 “재미있겠다”는 기대감이 들었다고 한다.

‘박막례 할머니’ 장바구니 영상부터 #10대의 문구류 사용후기 등 다양 #2007년 IT제품 리뷰가 언박싱 시작 #검색 유입 70% 이상은 명품 하울 #“취향 같은 사람들끼리 설렘 공유” #1인 가구 젊은층 사회적 유대감 충족 #“살 수 있는 돈 있어 좋겠네” 냉소도

20분 동영상 준비에 일주일 쏟아  

장본 걸 보여주거나, 택배 박스를 뜯는 것도 유튜브에서는 콘텐트다. ‘언박싱(Unboxing)’은 구매한 제품의 상자나 택배를 뜯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하울(haul)’이라는 단어와 함께 쓰인다. 하울은 ‘끌다’라는 뜻인데, 유튜브 세계에서는 매장에 있는 제품을 쓸어 담듯이 많이 사오는 걸 뜻하는 용어다. 마음껏 쇼핑하며 ‘하울’을 한 다음, 카메라 앞에서 ‘언박싱’하는 것이 이 콘텐트 영상의 법칙이다. 박막례 할머니의 장바구니 영상은 92만 조회 수를 훌쩍 넘겼다. 시장에서 살 수 있는 물건이라면 모두 언박싱·하울 영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고등학생 유튜버는 문구류를, 뷰티 유튜버는 화장품을 ‘하울’해서 ‘언박싱’한다.

언박싱은 2007년 IT 제품 리뷰가 기원이다. 2010년 미국의 패션 디자이너 제프리 스타가 명품 하울 영상을 올리면서 전 세계적인 유행이 됐다. 그런 이유로 언박싱·하울 영상은 명품이나 IT 제품이 주를 이룬다.

유튜브 채널 PNB TV의 써니 킴 크리에이터는 “검색 유입의 70% 이상이 ‘명품 하울’”이고, “그 외 유입 검색어도 ‘언박싱’이나 기타 명품 상호”이었다고 설명했다. 해당 유튜브 채널은 구독자가 4300명 남짓이지만 명품 하울 영상은 최대 조회 수 7만4000여 회를 기록했다. 써니 킴은 20분 내외의 언박싱·하울 영상 준비에 일주일의 시간을 쏟는다. 그가 명품 하울 영상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20대 지인의 추천이었다. “요즘 명품 하울 많이 보거든요. 언니도 명품 자주 사니까 한번 올려봐요.” 그만큼 20대에게는 널리 알려졌다.

명품 언박싱·하울의 인기 요인은 무엇일까. 김의연 인하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전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소비를 보며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1970·80년대에는 나훈아 등의 가수, 90·2000년대는 아이돌이었다면, 2010년대에는 유튜버가 대리 만족을 유발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대리 만족을 느끼는 대상이 재력이나 외모가 뛰어날수록, 만족감 역시 더 커지는 경향이 있다. 장바구니 하울보다는 명품 하울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차피 대리 만족할 거, 비싼 거 보고 대리 만족을 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한 유튜브 덧글에서도 드러난다. 명품 하울을 자주 본다는 직장인 김랑(25)씨도 “내가 구매할 수 없더라도 장인이 만든 명품을 클릭 몇 번으로 자세히 볼 수 있어 만족스럽다”고 설명했다.

기업 홍보 목적으로 제품 나눠주기도  

유투브용어

유투브용어

정보를 얻기 위해서도 언박싱·하울 영상은 유용하다. 유튜버들은 카메라 가까이 명품 제품을 가까이 가져와 보여준다. 박음질, 천의 재질, 버튼까지 디자인 요소를 낱낱이 분석하고 브랜드의 역사도 설명해준다. 이 옷은 어떤 식으로 코디하면 예쁠지 말해준 다음 실제로 코디대로 입고 나와 보여주기도 한다. 회사와 제품명, 가격까지 소개한다. 직장인 최지원(27)씨는 명품 하울을 보다가 “저 명품은 나도 돈을 아끼면 살 수 있을 것 같다”며 6만 4000원짜리 귀걸이를 탐냈다.

IT 언박싱으로 장르를 바꾸면 전달되는 정보의 수준은 더 자세해진다. 유튜버 ‘잇섭’은 두 달 전 태블릿 PC 언박싱 영상을 올렸다. 포크로 테이프에 구멍을 뚫어 박스를 뜯은 유튜버는 “타사는 비닐 포장을 하는데, 이 회사 제품은 부직포 같은 재질로 포장했다”며 사소한 차이까지 짚어 낸다. 카메라의 화소, 사용된 프로세서와 메모리, 신제품에서 사용할 수 있는 특별한 기능도 소개하고, 경쟁사 제품과 나란히 두어 화면 비율이나 음질도 비교한다. 이 영상은 57만 조회 수를 기록했다.

대학원생 노혜인(25)씨는 “운동화나 전자 기기를 살 때 언박싱 영상을 일부러 찾아본다”며 “고가의 물건을 살 때는 신중하게 제품을 샅샅이 뜯어보고 리뷰해주는 언박싱 영상이 크게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기업에서도 홍보를 목적으로 유튜버들에게 제품을 나눠줄 때도 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실제로 구매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사지 않더라도 물건에 대한 전문적인 정보를 얻음으로써 특정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지 않겠느냐”며 다양한 해석을 제시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도 “유튜브 등 SNS에서는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직접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물건을 함께 뜯는 설렘을 공유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물론 따가운 시선도 존재한다. 취업준비생 김모(26)씨는 “명품 하울을 몇 번 봤지만, 어차피 ‘그사세(그들이 사는 세상)’라고 생각해서 흥미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딱히 하울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저렇게 살 수 있는 돈이 있어서 좋겠네”, “별로 안 예뻐 보이는데 왜 샀는지 모르겠다”며 냉담한 반응이다. “돈이 그렇게 많냐. 그 돈으로 왜 저런 물건을 사느냐”는 내용의 악플도 심심찮게 달린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언박싱·하울 영상의 인기를 혼자 사는 젊은 세대의 증가와 연결지었다. 이 교수는 “혼자 사는 젊은 세대는 사회적 유대감을 유튜브로 간접적으로 충족하고 있다”며 “평범한 유튜버들이 산 물건을 자랑하는 모습을 보며 남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확신을 받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남들의 장 본 물건까지 20대들이 궁금해하는 이유다. 실제로 KB금융경영연구소가 발표한 ‘2019 한국 1인 가구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기준 1인 가구는 약 562만으로, 전체 인구의 10.9%에 해당한다. 2045년엔 인구의 16.3%가 1인 가구로 살 전망이다.

별별 사생활 공유 … 남들도 나와 다르지 않네요

유튜브 세계에서 WIMB는 ‘내 가방에는 무엇이 있을까(What’s in my bag)’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자신의 가방 안에 무엇이 담겼는지, 이 물건을 왜 넣었는지 카메라 앞에서 보여준다. ‘나와 같이 준비해요(Get ready with me, GRWM)’도 있다. 자신이 외출을 준비하는 과정을 찍어 유튜브로 올린 것이다. 고교생 유튜버 ‘가은’이 만든 GRWM 영상은 알람 소리로 시작한다. 유튜버는 알람을 듣고서도 한참이나 일어나지 못 하며 졸린 눈을 비비적거린다. 양치를 하고, 머리를 감고, 아침에 스킨과 로션, 선크림을 바르는 내용이 이어진다. 교복까지 갖춰 입은 유튜버는 학교에 다녀오겠다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며 영상을 종료한다. 5분짜리 영상은 조회 수가 110만 회가 넘었다.

GRWM이 외출 전 과정을 보여준다면, 루틴은 자신이 생활할 때, 어떤 순서로 진행하는지를 소개한 영상이다. 운동하는 법을 알려주는 ‘운동 루틴’과 외출에서 돌아와 잠들 때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나이트 루틴’이 인기다. 나이트 루틴에서는 외출 복장을 정리하고 화장을 지우고, 샤워를 하고 식물에 물을 주는 일상까지 낱낱이 공유한다. ‘Study with me’도 있다. 학생들이나 고시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스트리밍하는 것이다. 유튜버 ‘노잼봇’은 이 영상을 찍다 잘생긴 외모로 인기를 얻어 광고에도 나왔다. 김의연 인하대 교수는 “한국인들은 다른 문화권에 비해 심리적 거리감이 가까워 사생활을 공유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며 영상 업로드 이유를 진단했다.

한국에서 올린 WIMB·GRWM·루틴 영상에는 일본어나 영어로 달린 덧글들도 한국어 덧글만큼이나 많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불안할 때, 사람들은 남들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동조 심리를 갖는다”고 말했다.

강홍준 기자, 정미리 인턴기자 jeong.mir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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