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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환의 나공⑧] '창살 없는 감옥'서 카톡도 뚝…원전 지키는 국내 첫 女조종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새울 원전본부에 있는 신고리 3ㆍ4호기 전경. [한국수력원자력]

새울 원전본부에 있는 신고리 3ㆍ4호기 전경. [한국수력원자력]

자동차ㆍ비행기ㆍ선박은 면허가 있어야 다룰 수 있다. 그렇다면 원자력 발전은 어떨까. 이동 수단은 아니지만 24시간 ‘생물(生物)’처럼 움직이는 원전도 ‘원자로 조종사(RO)’ 면허가 있어야 다룰 수 있다. 원자로 이론, 운전 제어, 방사선 안전관리 등 5개 과목 필기시험을 거쳐 원전 운전 실기시험까지 통과해야 면허를 딸 수 있다. ‘원전 조종’이 공기업인 한국수력원자력에서만 필요한 직무라 사실상 한수원 직원만 가진 면허다.

2013년 여성 최초로 최신 원전인 한국형 신형 경수로(APR1400) RO 면허를 딴 이경은(32) 한수원 새울 제1발전소 발전팀 차장의 업무 일지를 들여다봤다.

부산 기장 고리 원전 홍보관에서 포즈를 취한 한수원 이경은 차장. [한수원]

부산 기장 고리 원전 홍보관에서 포즈를 취한 한수원 이경은 차장. [한수원]

PM 08:00, 밤 출근

남들 퇴근하는 시간이지만 나는 출근한다. 24시간 돌아가는 원전 특성상 3교대 업무를 해야 해서다. 오전 8시~오후 4시, 오후 4시~자정, 자정~오전 8시 3개 조로 움직인다. 휴가라도 떠나려면 대체 근무자를 세워야 한다. 대체 근무 일정이 맞지 않으면 16시간 연속 근무를 하기도 한다. 3개 조 근무표는 휴일ㆍ명절도 따로 없이 ‘무심하게’ 돌아간다.

그래도 나는 이 일이 하고 싶었다. 2010년 한수원에 입사해 처음 만난 선배들은 입버릇처럼 “기왕 한수원에 입사했으니 RO 자격증을 따서 운전팀에서 일하라”고 조언했다. 맞는 얘기로 들렸다. 실기 시험을 앞두고 ‘시뮬레이터(모의 훈련장)’실에서 한 달쯤 살았던 것 같다. 2013년 응시한 직원 97명 중 12명만 RO가 됐다. 여성 RO는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PM 10:00, 아궁이 불 때기  

원전은 흔히 짓는 게 반, 돌리는 게 반이라고 한다. 그만큼 운전ㆍ정비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모니터와 각종 전자 장비로 가득한 운전실에서 내가 하는 일은 ‘아궁이에 불 때는’ 역할이다. 핵연료가 24시간 꾸준히 일정 온도(약 300도)에서 타되, 폭주하지 않도록 유지하는 일이다. 크고도 위험한 원전이 면허를 따면서 배운 대로 착착 돌아갈 때면 신기하다.

‘멍’ 때리는 시간도 많지 않으냐고? 그랬으면 좋겠다. 1시간마다, 30분마다 꼬박꼬박 점검해야 하는 ‘숙제’가 많아 쉽지 않다. 바닷물 온도는 왜 그리 자주 바뀌는지. 화장실 갈 때도 동료에게 “잠시 살펴달라” 부탁하고 빨리 다녀와야 할 지경이다.

AM 00:00, 창살 없는 감옥

운전실은 세상과 단절한 공간이다. 창문도 없는 곳에서 3교대 근무하느라 시간 감각이 없다. 밖에 해가 떴는지, 비가 내리는지 모른 채 일한다. 스마트폰, 카카오톡 메신저도 못 쓴다. 가끔은 ‘창살 없는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식사조차 여기서 해결해야 한다. 끼니마다 식당에서 식사를 받아와 운전실에서 해결한다.

10명 안팎 동료와 주고받는 ‘원전 유머’가 유일한 낙이다. 오늘 저녁땐 영양사 아주머니가 급식 인원을 제대로 산정하지 못해 앞 근무조가 급식을 못 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아주머니 ‘로카(loca)’ 맞았다”며 깔깔 웃었다. 로카가 뭐냐고? 원자로를 냉각할 때 배관이 깨지는 등 불시에 일어나는 사고다.

신고리 3호기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이경은 한수원 차장. 원전 운전실은 보안 문제로 촬영할 수 없어 별도 사무실에서 인터뷰했다. [한수원]

신고리 3호기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이경은 한수원 차장. 원전 운전실은 보안 문제로 촬영할 수 없어 별도 사무실에서 인터뷰했다. [한수원]

AM 02:00, 도시락

오늘 간식은 샌드위치다. 밤새워 일하다 보면 아무래도 출출하다. 잠시 동료와 둘러앉았다. 아무래도 ‘탈원전’ 바람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왔다.

“대학에 원자력 공학 전공자가 많이 줄었다더라. 안 그래도 ‘3D’ 업무인데 우리가 마지막 RO 되는 것 아냐?”
“원전을 더 짓지는 않더라도 최대 2075년까지 가동하기로 한 원전 23기를 조종할 사람은 있어야 할 텐데 말이야.”

실제 RO 지원자가 크게 줄었다고 한다. RO 한 사람을 키우려면 적어도 6~7년 걸린다. 그런 소중한 자원이 줄고 있다니. 원전 비중을 줄이고 재생 에너지를 늘리는 건 가야 할 방향일 수 있다. 하지만 지어놓은 원전이 모두 멈출 때까지 안전하게 운영하는 것 역시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AM 04:00, 나는 원전 조종사다

마지막 버튼을 누르고 오늘 일지를 작성했다. 퇴근길 스마트폰 전원을 켜고 근무시간 중 걸려 온 전화는 없나 확인해 본다. 친구가 눈이 번쩍 띄는 뉴스를 보내왔다. ‘한국형 최신 원전, 美 수출길 열렸다’. 내가 RO 면허를 가진 APR1400이 미국에서 안전성을 인증받아 수출에 탄력이 붙을 거란 내용이었다. 내 일 같이, 아니 내 일이라 기뻤다. UAE에 원전을 수출했을 때, 시운전을 돕기 위해 파견됐던 선배 RO들 얘기가 떠올랐다. 새벽 근무 피로가 싹 가셨다.

집으로 가는 길을 비추는 가로등 불빛이 유난히 환해 보였다. ‘오늘 밤 내가 원전을 안전하게 돌린 덕분에 내 가족, 친구도 좀 더 편히 잠들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했다. 그래, 나는 대한민국 원전 조종사다.

김기환의 나공

[나공]은 “나는 공무원이다”의 준말입니다. 정부 경제 부처와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세금 아깝지 않게 뛰는 공무원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각 분야에서 묵묵히 일하며 헌신하는 이들의 고충과 애환, 보람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세종=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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