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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환의 나공③] 반도체공장 송전탑 갈등, ‘소방수’ 맡은 한국전력 갈등관리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국전력 갈등관리부 이홍곤(51) 차장과 인터뷰를 중심으로 1인칭 시점에서 재구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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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미션 스타트

결국 피하고 싶었던 명령이 떨어졌다.

“이홍곤 차장이 이쪽 전문가잖아. 안성 가서 소방수 역할 좀 해줘야겠어.”

경기도 서안성~고덕 송전선로 건설사업.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에 전력을 공급하는 중요한 사업이다. 하지만 산악지대 1.5㎞ 구간 송전선로를 땅에 묻는 지중화 문제를 두고 안성시 원곡면 주민들과 갈등이 불거졌다. 한전은 5년째 “고압선으로 건강권과 재산권이 침해될 수 있다”고 반발하는 주민들과 지루한 협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2008년부터 해온 일이지만 갈등 현장에 뛰어드는 건 언제나 쉽지 않다. 오만 생각이 떠올랐다.

‘경부선 지나는 것도 반대해 못 놓게 했다는 안성 주민들이라는데 이번에도 쉽지 않겠군’.
‘삼성전자가 있는 평택에 비해 소외당했다는 피해의식이 깊다던데 어떻게 달래줘야 하나’.

반도체 공장에 전력을 대기 위한 선로를 원곡면 일대에 깔아야 하다 보니 세수 증대 혜택은 평택에 돌아가는데, 송전탑 건립에 따른 재산권ㆍ건강권 피해는 안성에 돌아가는 구조라 해결이 쉽지 않았다. 협상 일지 서류를 뒤적이며 올라탄 안성 행 차창 밖으로 무심한 전신주만 휙휙 지나고 있었다.

주민과 협상 중인 이홍곤(오른쪽 둘째) 한전 차장. [한국전력]

주민과 협상 중인 이홍곤(오른쪽 둘째) 한전 차장. [한국전력]

<2018년 8월> 갈등은 원래 그렇다1.

“아 우리가 뭐 돈 바라고 그러는 줄 아십니까!”(주민)
“왜 옆 마을보다 보상비를 더 받아야 하는지 이유가 없잖습니까.”(이 차장)

결국 큰 소리가 오가고 말았다. 주민 얘기를 듣는 과정은 늘 쉽지 않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송전선로를 폭파해버리겠다” “송전선 깔면 분신하겠다” “당신 잘 되나 끝까지 두고 보겠다” 으름장을 듣는 경우도 많다. ‘건강권’을 앞세우지만 결국 보상을 바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건강 문제를 외치던 주민이 막상 송전선이 깔린 뒤 한참 지나 들러보면 어디에 송전선을 깔았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송전선로를 놓는 것을 막기 어렵다는 건 주민 스스로 너무나 잘 안다. 주민 대표가 마을 주민 입장을 대변하다 보니 좀 더 세게 나오는 측면도 있다. 그럴수록 들어주고, 들어주고, 또 들어줘야 한다. 다투면서 정든다고, 결국 우리는 손을 맞잡을 것이다.

그러고도 정작 회사에 주민 입장을 전하면 “너희는 주민 편이냐”고 타박듣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어쩌랴, 내 역할인 것을. 결국 내일 주민과 만날 때도 “오늘은 한전 직원 입장에서 이야기하지만, 회사로 돌아가면 여러분 이야기를 전하는 민원인 입장에서 보고 한다”고 말문을 뗄 것이다.

이홍곤(서 있는 사람) 한국전력 갈등관리부 차장이 경기도 안성 원곡면 주민들에게 송전선로 건설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전력]

이홍곤(서 있는 사람) 한국전력 갈등관리부 차장이 경기도 안성 원곡면 주민들에게 송전선로 건설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전력]

<2018년 9월> 갈등은 원래 그렇다2.

주민 대표와 얘기하다 보면 “기름값 좀 달라”는 식의 요구를 해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고생의 대가, 이해는 간다. 자기 시간 들여 주민들 불러야 하지, 오간 얘기 다시 전해야 하지, 그 과정에서 감정 소모는 덤이다. 그렇다고 해서 덥석 돈을 쥐여줘선 안 된다. “비밀은 없다. 결국 그 돈 받아서 해결이 잘 되든, 안 되든 뒷말이 나오는 데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설득한다.

그래도 안 통하는 한 주민 대표가 있었는데 오늘 잘 풀었다. 마을회관에 가서 주민들을 불러놓고 “이장님이 이렇게 고생하는 데 마을회관에 수고비 좀 쥐여 드려도 되겠습니까”라고 공지했다. 투명하게, 회식비로 쓰면서 ‘면’도 세워주는 식의 타협도 기술이라면 기술이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 송전선이 지날 곳을 답사한 이홍곤 한전 차장(뒷줄 왼쪽 네번째). [한국전력]

마을 주민들과 함께 송전선이 지날 곳을 답사한 이홍곤 한전 차장(뒷줄 왼쪽 네번째). [한국전력]

<2018년 10월> 협상, 또 협상….

모텔에서 일어났다. 아직 간밤 숙취로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이런 날이 며칠이더라’. 주민 대부분이 낮에 일을 나가기 때문에 협상은 오후 7시쯤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회의가 길어지다 보면 오후 10시, 11시까지 이어지는 건 보통이다. 마치면 ‘뒤풀이’로 이어질 때가 많다.

뒤풀이 자리에선 일부러 “전선 얘기는 하지도 말자”고 한다. 어르신이 대부분이라 그간 살아온 얘기, 자식 얘기, 남편 얘기 듣다 보면 자정이 훌쩍 넘는다. 대리 기사를 불러도 올 수 없는 시골인지라 근처 모텔에서 잠깐 눈만 붙이고 나온다. 이렇게 챙겨야 하는 마을이 20여 곳 되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만 만나도 6개월이 훌쩍 지나간다.

작은 선물을 들고 갈 때가 있는데, 보통 여성용으로 준비한다. 남성용으로 건넸더니 어르신들이 집에 가는 길에 이웃에 뿌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여성용으로 주니까 집에 가져가더라. ‘사모님’이 한전 편이 되면 협상이 한결 편하다. 그렇게 어느 정도 정이 쌓이면 식사 자리에 주민대표 부인과 함께하기도 한다.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야근, 주말 근무가 이어지다 보니 후배들이 갈등관리부 업무를 피하나 보다.

<2018년 12월> 꼬인 실마리.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상수원 보호구역 해제, 삼성전자 협력사 안성시 입주같이 어려운 요구사항을 제시하던 주민들의 기류가 바뀌었다. 얼마 전 주민 측에서 물류단지를 조성해 주는 조건으로 물류단지 밑으로 송전선을 지중화하는 것을 수용하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강경하던 입장에서 상당히 누그러진 안이었다. 비용 면에서나 명분에서나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회사에 보고했고,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주민들에게 전했다. 협상 중 처음으로 주민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문제는 안성시에서 터졌다. 안성시는 “산간 지역에 조성하면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갈등 해결이라는 게 경제성만으로 따질 순 없는 문제인데 여하튼 그렇게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나름 양보하고, 기대했던 주민들도 실망하는 눈치였다. 환호성은 “이렇게 실망하게 해도 되는 겁니까”란 원망으로 돌아왔다. 갈등조정위원장은 28차례 회의에도 결론이 나지 않자 “더 이상의 논의가 무의미하다”며 사퇴했다.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공장. [삼성전자]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공장. [삼성전자]

<2019년 3월> 급물살을 타다.

파국에 대한 불안감이었을까. 우리는 다시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마지막 들고 간 중재안은 아래와 같았다.

‘주민들이 지중화를 요구한 산간지역 송전선 1.5㎞ 구간에 대해 1. 지상 송전탑과 지하 터널을 동시에 건설한다. 2. 공사 기간이 짧은 송전탑을 2023년 건설하면 송출을 시작한다. 3. 2025년 터널을 완공하면 선로를 터널에 넣고 송전탑을 철거한다.’

대의를 위해 한전과 지역 주민이 조금씩 양보하자는 취지였다. 주민들은 2년간 송전탑을 허용해야 하는 게 싫었고, 한전은 사람이 살지 않는 산간지역에 송전선을 지중화한 선례를 남기기 싫었다. 삼성은 생각지 못한 터널 건설, 송전탑 철거비 750억원을 부담하는 게 마뜩잖았다.

협상 물꼬를 튼 건 삼성이었다. “전력만 빨리 공급된다면 추가비용을 내겠다”는 입장을 냈다. 한전도 뜻을 같이하자 주민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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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또 다른 시작

5년 만이다. 중단한 송전선 건설 사업을 재개하기로 했다. 오늘 한전과 안성시ㆍ삼성전자, 그리고 원곡면 주민대책위원회가 ‘서안성~고덕 송전선로 건설 상생 협약’ 양해각서(MOU)를 맺는다. M.O.U. 이 세 글자로 마침표를 찍기엔 너무도 지난했던 날들이 박수치는 내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이게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갈등은 계속될 것이고, 나는 언제나처럼 거기 있을 것이다.

세종=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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