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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로 불때느라 모니터 보며 식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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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자동차·비행기·선박은 면허가 있어야 다룰 수 있다. 그렇다면 원자력 발전은 어떨까. 이동 수단은 아니지만 24시간 ‘생물(生物)’처럼 움직이는 원전도 ‘원자로 조종사(RO)’ 면허가 있어야 다룰 수 있다. 2013년 여성 최초로 최신 원전인 한국형 신형 경수로(APR1400) RO 면허를 딴 이경은(32) 한수원 새울 제1발전소 발전팀 차장의 업무 일지를 들여다봤다.

여성 1호 ‘원자로 조종사’ 이경은씨 #핵연료 온도 300도 유지시켜야 #3교대로 창문 없는 운전실 근무 #탈원전에 후배 끊어질까 걱정도

부산 기장 고리 원전 홍보관에서 포즈를 취한 한수원 이경은 차장. [사진 한국수력원자력]

부산 기장 고리 원전 홍보관에서 포즈를 취한 한수원 이경은 차장. [사진 한국수력원자력]

◆PM 08:00, 밤 출근=남들 퇴근하는 시간이지만 나는 출근한다. 24시간 돌아가는 원전 특성상 3교대 업무를 해야 해서다. 오전 8시~오후 4시, 오후 4시~자정, 자정~오전 8시 3개 조로 움직인다. 휴가라도 떠나려면 대체 근무자를 세워야 한다. 대체 근무 일정이 맞지 않으면 16시간 연속 근무를 하기도 한다. 3개 조 근무표는 휴일·명절도 따로 없이 ‘무심하게’ 돌아간다.

◆PM 10:00, 아궁이 불 때기=원전은 흔히 짓는 게 반, 돌리는 게 반이라고 한다. 그만큼 운전·정비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모니터와 각종 전자 장비로 가득한 운전실에서 내가 하는 일은 ‘아궁이에 불 때는’ 역할이다. 핵연료가 24시간 꾸준히 일정 온도(약 300도)에서 타되, 폭주하지 않도록 유지하는 일이다. ‘멍’ 때리는 시간도 많지 않으냐고? 1시간마다, 30분마다 꼬박꼬박 점검해야 하는 ‘숙제’가 많아 쉽지 않다. 바닷물 온도는 왜 그리 자주 바뀌는지. 화장실 갈 때도 동료에게 “잠시 살펴달라” 부탁하고 빨리 다녀와야 할 지경이다.

◆AM 00:00, 창살 없는 감옥=운전실은 세상과 단절한 공간이다. 창문도 없는 곳에서 3교대 근무하느라 시간 감각이 없다. 밖에 해가 떴는지, 비가 내리는지 모른 채 일한다. 스마트폰, 카카오톡 메신저도 못 쓴다. 가끔은 ‘창살 없는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식사조차 여기서 해결해야 한다. 끼니마다 식당에서 식사를 받아와 운전실에서 해결한다.

◆AM 02:00, 도시락=오늘 간식은 샌드위치다. 잠시 동료와 둘러앉았다. 아무래도 ‘탈원전’ 바람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왔다. “대학에 원자력 공학 전공자가 많이 줄었다더라. 안 그래도 ‘3D’ 업무인데 우리가 마지막 RO 되는 것 아냐?”

실제 RO 지원자가 크게 줄었다고 한다. RO 한 사람을 키우려면 적어도 6~7년 걸린다. 그런 소중한 자원이 줄고 있다니. 원전 비중을 줄이고 재생 에너지를 늘리는 건 가야 할 방향일 수 있다. 하지만 지어놓은 원전이 모두 멈출 때까지 안전하게 운영하는 것 역시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AM 04:00, 나는 원전 조종사다=마지막 버튼을 누르고 오늘 일지를 작성했다. 퇴근길 스마트폰 전원을 켰다. 친구가 눈이 번쩍 띄는 뉴스를 보내왔다. ‘한국형 최신 원전, 미국 수출길 열렸다’. APR1400이 미국에서 안전성을 인증받아 수출에 탄력이 붙을 거란 내용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을 비추는 가로등 불빛이 유난히 환해 보였다. ‘오늘 밤 내가 원전을 안전하게 돌린 덕분에 내 가족, 친구도 좀 더 편히 잠들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했다. 그래, 나는 대한민국 원전 조종사다.

세종=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이 기사는 경제 부처를 중심으로 세금 아깝지 않게 뛰는 공무원·공기업 이야기를 전하는 [김기환의 나공] 시리즈입니다. ‘나공’은 ‘나는 공무원이다’의 준말입니다. 인터넷 (https://www.joongang.co.kr)에서 더 많은 콘텐트를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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