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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주교단 담화문 전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우리 나라는 지금 민주화와 함께 통일을 향한 열망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국민 개개인은 희망 혹은 고통을 느끼며 마름대로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기여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천주교 신자들도 이 나라 국민으로서 함께 통일을 향한 대장정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진 교회는 북한선교에 임해야 할 것임을 스스로 깨닫고 서로의 힘을 모을 것을 기대하며 한국주교단은 남북 통일 문제를 중점적으로 논의할 간담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주교단 산하의 정의평화위원회와 북한선교위원회의 「통일 논의」에 대한 의견을 듣고 또 4개 정당(민정, 평민, 민주, 공화)의 통일정책을 각각 청취하며 주교단으로서의 통일에 대한 사목 대책을 연구하러 하였습니다.
시기적으로 서울세계성체대회를 앞두고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임을 온 인류에게 선포하여야 할 한국교회가, 또한 국내적으로 「한마음 한 몸」 운동을 펴나가고 있는 이때에 동족인 북한 형제를 생각하고, 통일을 재촉하며, 형제가 사랑의 일치를 이루고 싶은 마음은 그 누구에게나 간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남북한은 각각 독자적이요 서로 이질적인 두 체제로 분단되어 살아온 지가 40여 년에 이르고 모두가 통일을 염원하고 있으나 통일된 나라의 모양을 각각 다르게 생각하고 있음도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기에 통일이 우리의 마음같이 단숨에 이루어지리라고 예측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4개 정당의 통일정책의 기본 방침도 남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평화 공존의 단계를 거치며, 단일 국가로의 동일을 성취하는 길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적어도 현재로서는 공통된 기초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야가 모두 대 북한 창구의 단일화와 동시에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대화가 필요한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지난해 노태우 대통령의 7·7 선언은 참으로 많은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천주교회의 지도자들도 대단히 훌륭한 정신이 담겨 있는 선언으로 환영하여 마지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선언이 불편 없이 최대한으로 실천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충실한 세부 지침이 없었고 기쁜 마음으로 통일에 헌신코자 하는 한 사람들이 단지 그 성급함 때문에 깊은 좌절을 맛보게 한 것도 사실이라 지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몇몇 사람들이 법질서에 혼란을 초래하면서 개별적으로 통일을 위한 대화에 나선다는 명목으로 북한의 제의에 응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그들은 거의 기독교인이며 천주교 신자임으로 인하여 천주교가 마치 용공 집단인 것 같은 오해를 받기에 이른 것도 부인 못할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밝힐 것은 천주교는 근본적으로, 무신론이며 유물론인 공산주의를 수용하지 않습니다. 다만 공산주의자들도 인격적인 사랑을 주고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대로인 것입니다.
국가적인 차원의 협상과 개인적인 차원의 친교 내지 대화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불명확한 한계의 어려움 때문에 남북한 관계의 모든 대화와 교섭은 특별히 신중하여야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간담회가 열리고 있는 동안 뜻밖에 정의구현사제단이 기자회견을 통하여 발표한 문규현 신부의 파견에 대한 소식을 충격과 함께 접하게 되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이 한국 천주교회에서 공인한 단체가 아니더라도 천주교 신부의 단체라는 점에서 주교단은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통일을 촉진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나 우리 사회의 상황에서 수용하지 못할 행동이 앞섬으로 인해 많은 국민에게 우려와 불안을 준 것은 마땅한 행동이 아니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차제에 우리 주교들도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에 책임을 느끼는 바입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되든 이 사회가 혼란 가운데 빠지든 상관없이 각자의 판단에 따라 각자가 행동하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기 주장이 과도히 분출하고 있음을 보면서 우리 사회는 하루속히 보다 거시적이고 올바른 판단으로 신중한 행동을 하게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좀더 법질서를 확립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법을 존중하는 시민정신의 확립이 시급한 형편이라 하겠습니다. 법질서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질서도 하루속히 정립되어 빈부의 격차가 줄어들고 물질주의·쾌락주의·금전만능주의와 이기심이 절제되고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사랑의 사회가 이루어지도록 한국 천주교회는 힘을 다하여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로가 사랑하는 사회를 이루지 못할 때 통일은 더욱 요원헌 것이 될 것임을 우리는 염려하며 사랑과 일치와 평화의 세상을 이루어 나갈 것을 다시 다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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