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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기, 얼버무리기, 외면하기…위험한 정책 자의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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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논설위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논설위원

한가지는 또렷해졌다, 정부를 믿는 건 순진한 생각이란 사실이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3월 5일 이렇게 말했다. “작년 말 민주노총이 기관을 점거하는, 그때의 방조적인 기조가 계속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데, 좌시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씀드린다.” 인지능력이 떨어진 건 아니었다. 불법을 알고도 외면했다는 걸 시인했으니 말이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도 했다.

현대중공업에서 벌어진 사태에 그 다짐이 통했던가. 지난 3월 문재인 대통령은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축하했다. 조선업 구조조정의 성과로 여겼다. 노조는 대통령의 축하를 업어 메쳤다. 점거하고, 부수고, 때리며 막아섰다. 노조가 대통령 위에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정부는 입장 표명 한 번 없었다. 이 장관은 난리 통 속에 주주총회가 끝나고 나서야 “불법은 엄정 처리하라”고 일선 기관장에 지시했다. “배 지나간 다음에 큰소리친다”는 말이 나왔다, 축하할 땐 언제고, 일이 벌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는 이 정부의 행보를 어떻게 봐야 할까.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은 지난달 말 국가경쟁력 평가 결과를 발표했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지만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국내 경영인에게 경제의 매력요인 15개 지표를 제시하고 5개를 선택하도록 했다. 중복 투표인데도 10%의 선택도 못 받은 항목은 딱 세 가지였다. ▶세금 ▶노사관계 ▶정책의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이다. 요약하면 ‘노사관계가 엉망인 데다 정부 정책은 오락가락해 믿을 수 없다. 그 와중에 (준)조세 부담이 주야장천 늘어나니 기업하기 힘들지 않겠는가’라는 얘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를 비롯한 국제기관들은 한목소리로 경제활성화 대책을 주문했다. 핵심 대책으로 생산성 향상을 꼽았다. 정부에서 최근 나온 투자 활성화 대책은 10조 원대 테마파크 추진, 공공부문 추가 투자 등이다. 생산성 향상 대책은 어디에도 없다. 생산성은 노동개혁과 맞물려 있다. 노조와 충돌이 불가피하다. 돈 퍼붓는 대책만 있는 있는 이유가 혹 그 때문은 아닌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정부의 자의적 해석은 정책을 비판했을 때 어김없이 나타난다. ‘사실은 이렇습니다’라는 제목이 붙은 해명자료를 통해서다. 고용부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면 공익요원이나 산업기능요원이 군대에 가야 한다는 보도가 나오자 득달같이 해명자료를 냈다. ‘현역과 보충역 중 선택할 수 있게 하면 문제가 없다’는 요지다. 현역으로 복무 하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며, 설령 입대한다고 하더라도 군은 4급 판정자가 포함된 인력으로 전투력을 어떻게 유지하고 관리한다는 건지 의문이다.

더욱이 협약 위반 여부는 ILO가 따진다. 우리 권한이 아니다. ILO는 2007년부터 ‘보충역은 강제노동협약의 제외 대상이 아니다’고 못 박았다. 이 기조는 한 번도 변한적 없다. “ILO와 협의해 나가겠다”고 하면 이해할 법도 한데, 우리 권한도 아닌 걸 두고 “문제없다”고 우기니 고개가 절로 갸우뚱해진다.

기획재정부는 OECD의 한국 경제전망 보고서를 번역해 내면서 집중적으로 다룬 최저임금 부분을 쏙 뺐다. 고의 누락 의혹이 일었다. 기재부는 “새로운 내용 위주로 자료를 제공했다”고 해명하고 넘어갔다. 예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노무현 정부 당시 노동부는 비정규직 통계를 실수로 잘못 작성한 관련자를 문책했다. “일단 우긴다. 그게 아니면 얼버무린다. 상황이 심각해지면 외면한다. 그래도 안 되면 대응하는 척 시늉하고 때운다.” 저녁 자리에서 학자들이 내린 정책 진단이 귓가를 맴돈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