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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최태원의 ‘사회적 가치’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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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홍승일
홍승일 기자 중앙일보 실장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 Don’t buy this jacket (우리 제품 사지 마세요)’

미국의 아웃도어 업체 파타고니아가 금세기 글로벌 의류브랜드의 친환경 선두주자로 자리 잡은 데는 이런 기발한 광고가 한몫했다. 미국의 쇼핑 대목인 2011년 11월 25일 블랙 프라이데이 아침이었다. 조간신문 뉴욕타임스에는 이 회사 재킷 사진에다 위와 같은 문구를 곁들인 전면광고가 실려 있었다. 왜 자기회사 물건을 사면 안 되는지에 대한 찬찬한 배경설명까지 뒤따랐다. “이 옷 하나 만드는데 135의 물이 쓰였고, 옷 무게의 24배인 20파운드 탄소가 배출됐으며, 완제품의 3분의 2 분량이 쓰레기로 남았다.” 하지만 ‘자폭’ 수준의 광고 카피가 화제를 모으며 제품은 더 많이 팔려 나갔다. 환경보호 의지에 대한 격려였다.

SK와 최태원 회장이 드라이브를 거는 ‘사회적 가치(SV, Social Value)’ 경영을 선명하게 이해하려면 이 사례를 머리에 넣어두라고 한다. SK가 지난주 간판 계열 3사 이노베이션·텔레콤·하이닉스의 SV 창출 측정 결과를 처음 발표했는데 파타고니아와 흡사한 부분이 많다. SK이노베이션의 경우 석유제품 공정에서 발생한 온실가스 배출 효과를 무려 마이너스 1조4276억원으로 계상했다. 이만큼 SV를 갉아먹었다는 뜻이다. 일부 경영진은 “에너지 업의 특성상 온실가스 배출의 부정적 영향을 우리만 유독 부각할 필요가 있나”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SV 측정 작업을 진두지휘한 최 회장은 부정적 수치를 여실히 드러내 회사 안팎의 경종으로 삼자고 했다. SV란 기업 경영 활동에서 실업·환경오염 같은 사회 고민을 해결한 성과다. 일반 재무제표의 매출·이익 등 기업 경영의 경제적 가치와 대비된다.

최 회장 실험의 다음 단계가 기대되는 건 SV 운동이 비즈니스 현장에 제대로 먹힐 동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최(崔)의 공식’이라는 1000여 가지 SV 측정 산식을 토대로 회사별·부서별 SV 창출 규모가 나온다. 올해 주요 계열사 경영실적부터 임원과 최고경영자(CEO) 고과평가를 할 때 매출·이익 같은 경제적 가치보다 SV에 높은 비중을 두기로 했다. 돈 잘 버는 영업통 CEO라도 사회적 문제 해결 실적이 미미하면 임기를 채우지 못할 수 있다.

SV 경영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 커질 조짐이다. 28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SK 주최로 열린 ‘소셜 밸류 커넥트 2019’ 행사만 봐도 당초 참가 예상인원 2000명의 두 배가 넘는 인파가 몰렸다. 80여 기업·기관의 이색 SV 추진 사례 수백 건이 발표된 공유와 혁신의 민간 축제였다. ‘봉준호 자체가 장르’라는 극찬을 듣고 막 귀국한 봉 감독이 단상에 올라 ‘주 52시간 근로와 밥때 지키면서 황금종려상 수상작 만들기’ 같은 주제 발표를 했다면 히트칠 뻔했다.

재계 3위 대기업 집단의 유별난 SV 드라이브에 대한 궁금증도 있다. 우선 ‘영리한 마케팅’ 아니냐는 의구심이다. 사실 크고 작은 기업들의 요즘 사회공헌을 보면 순수한 의도인지 장삿속인지 분간이 잘 안 가는 경우가 적잖다. 염용섭 SK 경제경영연구소장은 “독일 화학 그룹 바스프처럼 진정성을 갖고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들은 이윤과 사회적 가치를 동전의 양면으로 본다”고 말한다. 파타고니아가 자사 제품 불매운동을 벌인 일은 윤리경영 교과서와 마케팅 교과서에 다 실려 있다.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대표적 분야가 공유경제다. 하지만 우버·카카오·타다 같은 공유 택시 갈등 하나 7년째 해결하지 못하는 척박한 토양이다. 이런 땅에서 최태원의 SV 경영철학이 영화의 봉준호 같은 새로운 장르를 경영계에 펼쳐 나갈지 주목된다.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