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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현대중 충돌현장, 정부는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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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오원석 산업1팀 기자

오원석 산업1팀 기자

갈등으로 점철된 울산의 5월이 지났지만 상처는 곳곳에 남았다. 지난달 31일 현대중공업의 물적분할 안건이 오른 주주총회를 노동조합이 물리적 저지에 나서면서 남은 흔적이다.

주총장을 점거한 노조 조합원 5000여명에 회사 측 주총 진행 요원과 경찰 병력 5000여명이 충돌했지만 현장 어느 곳에서도 정부는 없었다. 정부는 노조의 주총 저지가 무위로 돌아가고 분할 안건이 통과된 직후에서야 기다렸다는 듯 입장을 내는 등 이해 못 할 대처로 일관했다.

조선산업을 책임지는 산업부는 존재감이 없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한 관계자가 “민간기업의 경영 의사결정과 관련한 부분이라 산업부에서 의견을 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고 말했을 뿐이다. 고용부도 무력했다. 고용부 울산고용노동지청 관계자는 “5월 중순~하순 두 차례 현대중공업 노사를 각각 방문해 노조 측에 쟁의행위를 위한 절차가 갖춰져 있지 않아 파업을 강행할 경우 불법 소지가 있으니 불법요소를 없애고 진행할 것을 지도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31일 현대중공업 주주총회가 열린 울산대 체육관 벽면이 파손돼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31일 현대중공업 주주총회가 열린 울산대 체육관 벽면이 파손돼 있다. [연합뉴스]

노조법상 쟁의행위는 임금·처우 개선 등 ‘근로조건 향상’ 목적으로만 허용된다. 이번 노조의 파업은 경영권 개입으로 사실상 불법이다. 불법 파업이 예고된 상황에서도 고용부는 지켜보기만 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주총이 끝난 지난달 31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면세점 개장식에서 기자들과 만나 “최근 며칠 노조가 주총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불법 상황이 이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재갑 고용부 장관의 태도는 ‘뒷짐 정부’의 화룡점정이었다. 이 장관은 주총 당일 오후 15개 지방고용노동관서장이 참석한 회의에서 “노동조합의 폭력과 점거 등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며 “법의 테두리 안에서 주장해야 하며 불법행위에 대해 관계기관 등과 협조해 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중공업 노조의 불법 쟁의행위에 대한 엄포였으나 이 장관의 발언은 노조-경찰의 대치가 끝나고 2시간이나 지나서야 나왔다. 노조가 주총장을 점거해 충돌을 일으킨 시점은 지난 27일 오후. 96시간이나 지나서야 나온 이 장관의 ‘엄정조치’에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다.

현대중공업의 물적분할 안건 통과는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 기업결합의 첫 단추다. 앞으로 노조의 분할 안건 통과 원천무효 주장과 해외 기업결합 심사까지 가시밭길이 예고돼 있다. 하지만 그 첫 단추를 끼우는 과정에서 우리 국민이 목격한 건 제 손으로 입을 막은 답답한 정부의 모습뿐이었다.

오원석 산업1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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