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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정권 최고 실세는 이슬만 먹고 살 수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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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권력 실세는 이슬만 먹고도 살 수 있나. ‘문재인 정부 최고 실세’라는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이 지난 14일 취임 일성으로 무(無)급여를 선언했다는 소식을 듣고 맨 처음 든 궁금증이었다. 본인의 직접 설명은 없었지만 민주당 관계자 입을 통해 “1호 업무지시가 무급여”라며 “사심 없이 당에 헌신하겠다는 의미”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주로 현직 의원이 겸직했던 과거와 달리 양 원장은 다른 밥벌이가 없는 상근자라, 주변에서는 생계를 위해서라도 월급을 받아야 한다고 권했지만 “실세라 월급 받는다”는 불필요한 오해를 받기 싫다는 본인 의지가 확고했다고 한다.

양정철, 오해 싫다며 월급 고사 #‘사적 회동’의 비싼 밥값 궁금 #‘컬링과 커피믹스’ 교훈 새겨주길

사심·헌신·오해…. 이런 키워드에 내년 총선을 기필코 승리로 이끌겠다는 양 원장의 절박함이 담겼으려니 하면서도 한편으론 의아했다. 바뀐 규정상 받을 수도 있었던 멀쩡한 월급인데 무슨 그리 큰 오해를 받는다고 고사한 걸까.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나 장하성 주중대사처럼 수십, 수백 억원대 자산가도 아니고 교사 아내를 둔 기자(언론노보)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 청와대 비서관 경력이 사실상 경제활동의 전부인데 무슨 쌓아둔 돈이 있어 월급을 마다할까. 뉴질랜드로, 일본으로, 또 미국으로 떠돌았던 지난 2년간은 뉴질랜드 사는 형 도움도 받고 지난해 3만 권 팔았다는 책 인세(출판계 관행상 4500만원으로 추정)로 그럭저럭 충당했다 쳐도 앞으로는 무슨 돈으로 다양한 비용들을 감당하려 하나. 판공비를 사적으로 쓸 수도 없는 노릇인데 엄청난 자기절제를 필요로 하는 대단한 희생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희생인가. 그리고 이 헌신에는 어떤 대가가 기다리고 있을까. 이런 궁금증이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던 와중에 양 원장이 서훈 국가정보원장과 지난 21일 일인당 한 끼 식사값이 10만원 안팎인 서울 강남의 고급 한정식집에서 4시간 넘는 비공개 만찬을 했다는 보도가 최근 터져 나왔다. 식당주인이 양 원장을 태운 모범택시 기사에게 5만원을 쥐어주며 택시비를 대신 내주는 사진도 함께 공개됐다. 양 원장 스스로  “총선 승리의 병참기지 역할”이라고 정의했듯이 그는 여당의 총선 전략을 짜는 최고 실세다. 이런 인물이 국가 최고정보기관 수장과 장시간 비공식적으로 만난 것이나 식당주인에게 택시비를 대납받은 건 어떻게 봐도 부적절하다. 오해가 무서워 월급도 안 받는다더니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이런 처신에는 “사적인 지인 모임”이라고 선을 그으며 “공직에 있는 것도 아닌데 일과 이후의 삶까지 주시받아야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린다.

4시간 넘도록 민감한 얘기 하나 안 했다는 해명을 믿기도 어렵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소소한 궁금증은 여전히 남는다. 식당주인은 진작에 각자 밥값 계산했다고 딱 한 마디만 했으면 좋았을텐데 굳이 “백수인 줄 알고 택시비는 대신 냈지만 밥값은 누가 냈는지 말 할 수 없다”고 입을 다물었고 양 원장은 “현금 15만원을 미리 (본인 식사비로) 냈다”고 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돈은 어디서 나왔을까. 판공비일까, 개인돈일까. 사적 모임이라면 개인 호주머니에서 나가야 마땅하지만 월급 한 푼 없는 양 원장이 교사 아내에게 용돈 받아 냈을 것 같지는 않다.

국정원의 정치개입 의혹 같은 심각한 정치적 공방이 오가는 마당에 한 끼 밥값이 어디서 나왔는지가 무슨 대수냐고 타박할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꼭 그렇게 볼 문제는 아니다. 양 원장의 취임 이후 벌어진 일련의 소동을 지켜보면서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불거진 여자컬링 횡령사건 당시 한 직장인이 SNS에 쓴 글 하나가 떠올랐다. 야근비를 제대로 챙겨주는 회사가 드물던 시절 첫 직장에서 만난 부서장은 “야근 하면 반드시 야근비를 청구하라”고 주문했단다. 몇 시간이라도 공짜로 일해준다는 생각이 들면 처음엔 회사에서 커피믹스 한두 개나 A4 용지 하나 정도 집에 가져가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결국엔 회삿돈과 개인돈 구분이 없어져 큰 부정을 저지르게 된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이 직장인은 ‘컬링 대부’ 김경두 일가가 ‘팀킴’ 상금을 횡령한 건 용납할 수 없지만 자기 땅을 무상으로 기증까지 했던 그들 눈엔 이 정도 상금은 평생 헌신한 대가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 썼다. 내돈, 남의 돈 경계가 모호해지는 건 물론이요 헌신의 청구서를 내미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는 얘기다. 이슬 말고 강남 한정식 먹는 실세가 헌신을 내세워 무월급 선언한 걸 마냥 선의로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양 원장은 이 정권에 부채를 떠안기지 말고 지금이라도 일한만큼 월급을 받으면 좋겠다. 그게 정권과 본인 모두에게 혹시 닥칠 지 모를 불미스런 일을 방지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