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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문재인식 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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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

초대 법제처장은 유진오 박사다. “헌법의 기초자에게 자법(子法)인 법률과 명령도 입안하게 하는 게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어 법제처장직을 맡겼다”(『현민 유진오 평전』)고 한다. 그는 대통령실 옆방에 자리 잡곤 8개월여 대한민국 법령 체계를 만들어냈다. 스스론 “나 한 몸뿐인 데다 정부와 국회의 크고 작은 법률문제를 전부 나에게로 가져와 질문하는 통에 정말 골치를 앓았다”고 했다.

그 후 70여 년 법제처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처장의 직위가 장관·차관을 오가다 지금 차관급이 됐지만 말이다. 바로 법치 행정의 중추다. MB(이명박) 정부에서 법제처장을 지낸 이석연 변호사는 “전체 부처의 법제 업무를 총괄하는 사실상 장관급이며 중립적 역할”이라고 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전 정부까지 30여 명의 역대 처장에게선 대충 그런 ‘규범’이 느껴진다. 대부분 법제처장이 마지막 임명직이었다. 대통령의 지근거리에 있던 이가 발탁된 경우는 1987년까지 올라가야 한다. 청와대 사정수석 출신의 김종건 처장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그러나 그게 깨졌다. 문 대통령과 같은 로펌에서 일했다는 게 사실상 경력의 전부인 이가 법제처장을 거쳐 이번에 청와대 인사수석이 됐다.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의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후임 처장이 됐다. 법제처장의 대통령 참모화다. 이는 법제 업무의 정치화로도 이어진다. 부인하고 싶은가. 지난해 10월 “평양선언이 국회동의 대상이 아니다”란 법제처의 창발적 유권해석을 기억하는가. 현 정부는 사법부와 검찰을 이미 ‘우군’으로 채웠다. 이젠 행정부의 법제처다. 거칠게 말하면 정부의 유권해석부터 법원의 판결, 헌법재판소의 결정까지를 현 정권과 가까운, 혹은 공감도 높은 이들이 좌우할 수 있는 모양새다. ‘문재인식 법치’의 씁쓸함이다.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